제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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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혜진은 집에 가기 전에 서영의 모친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사실은 서영이가 얼마 전에 멘스 시작했거든. 그것 때문에 심란한지 가끔씩 이상한 소리를 하고 그러네.’ 며칠 뒤 서영을 밖에서 다시 만났는데 여느 때처럼 밝은 모습이었다. 혜진이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그 아저씨 누구인지 알아냈냐고 묻자 서영은 입을 꾹 다물더니 잠시 후에야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장난 친 건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고, 그만 좀 잊어버리라고. 엄마 품에 안겨 그렇게 울었으면서 장난이었다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 후로는 서영이가 이상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서 혜진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근데 서영이가 입원했다는 소리를 들은 그날 밤 왠지 그 일이 떠오르더라고요. 예감이랄까, 직관이랄까. 아무튼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서영이한테 뭔가 이상한 일이 생겼다면, 그건 틀림없이 방학 중에 있었던 그 일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그리고 서영이가 보았던 그 사진들을 생각했죠. 만약 서영이가 헛 걸 본 게 아니었다면, 검은 양복 입은 어떤 이상한 아저씨가 남들 다 카메라 보는데 혼자서 서영이네 아버지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면, 그 모습을 오직 서영이 혼자만 볼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서영이는 얼마나 무섭고 쓸쓸했을까. 그걸 생각하니까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그 후로도 서영은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담임이 몇 번이나 전화를 해봤는데 연결이 안 되었다고 했다. 전화도 안 되고 집에 찾아가도 없고 어디 입원했는지 알 수도 없고, 혜진은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하고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일주일쯤 지나서였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서영이네 집에 전화를 걸었다. 받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고 습관처럼 해본 거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벨이 열 번이 넘게 울리도록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하면서 끊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혜진은 깜짝 놀랐다. ‘서영이니?’ 저쪽에서는 말이 없었다. 숨소리만 아주 가늘게 들려왔다. ‘이서영? 야! 말 좀 해봐! 서영이지? 그렇지?’ 잠시 후에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 서영이 아니야.’ 그러고는 전화가 툭 끊어졌다. 혜진은 전화기를 손에 쥔 채 길 한복판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목소리는 틀림없이 서영이었다. 자기는 서영이가 아니라고 한 게 도대체 무슨 헛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지금 집에 있는 게 분명했다. 혜진은 서영의 집으로 달려갔다. 서영이 집에 도착해서 벨을 눌렀더니 처음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문을 두드리며 서영이를 부르자 뒤늦게 서영의 모친이 나왔다. 그새 몰라보게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혜진이구나. 어쩐 일이니?’ ‘아줌마. 서영이 있죠? 퇴원해서 집에 온 거죠?’ ‘응. 그렇긴 한데…….’ 모친은 완강하게 문 앞을 막아섰다. 서영이가 아직 다 나은 게 아니고 불안정한 상태라며 지금은 일단 돌아가라는 거였다. 만나게 해달라고 졸라도 들어주지 않고 나중에는 화까지 내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돌아서고 말았다. 집에 가는 길에 골목에서 서영이 집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서영은 빌라 이층에서 살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창가를 보니 과연 서영이가 서 있었다. 반가워서 ‘서영아’ 부르며 손을 흔들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퍼뜩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보니 서영은 얼굴에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분명히 이쪽을 보고 있는데, 그게 마치 자기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 아니 사람도 아니고 풍경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무표정했다. 혜진은 섬뜩해서 저도 모르게 손을 내렸다. 잠시 후 서영이 엄마가 창가에 나타나더니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혜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학교에서 친구들이 혹시 서영이 소식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서영이의 그 무표정한 얼굴을 생각하니 말문이 막혔다. 집에 있다는 걸 알려줘도 어차피 만나지도 못할 거다 싶어 모르는 척했다. “그러고서 한 열흘 후였나. 서영이가 예고도 없이 학교에 돌아왔어요. 그날 주번이라서 일찍 학교에 갔는데 텅 빈 교실에 누가 혼자 창밖을 보고 서 있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뒷모습이 서영이 같은 거예요.” 옆으로 다가가서 얼굴을 보니 정말 서영이었다. 그때의 놀라움이란. 서영은 창밖에 시선을 빼앗긴 채 얼빠진 것처럼 있다가 혜진이 몇 번 부르자 뒤늦게 돌아섰다. 처음에는 놀란 표정이더니 이윽고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혜진이구나.’ ‘너 어떻게 된 거야? 이제 다 나았어?’ ‘응. 괜찮아.’ 서영은 그동안 많이 아팠는지 얼굴이 홀쭉해졌고 말하는 것도 기운이 없었다. 얼굴도 어두웠고 웃는 모습은 어쩐지 억지로 꾸민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물론 친구들은 기뻐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서영이 때문에 반이 들썩들썩했다. 애들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고, 어쩜 연락 한 번 안 할 수가 있냐고 타박을 하자 서영은 너무 아프고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어디가 그렇게 아팠냐는 물음에는 아빠 돌아가신 것 때문에 충격을 받은 거라고 대답했다. 혜진이 물었다. ‘의식불명이었다며? 그건 왜 그랬어?’ ‘아빠 돌아가셔서…….’ ‘그것 때문에 의식불명이었다고?’ ‘충격이 너무 크면 그럴 수도 있대.’ ‘내가 전화했던 건 기억해?’ ‘응? 그랬나?’ 서영은 시선을 피했다. 애가 얼버무리는구나 싶었지만 더 따질 수도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서영이 마냥 반갑기만 한 모양이었다. 아빠를 잃은 충격과 병마를 겨우 이겨내고 이제 막 돌아온 친구에게 잘해주려고 서로 경쟁까지 했다. 친구들이 그럴수록 혜진은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서영의 태도도 묘했다. 예전에도 여자애치고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는데 돌아오고 나서는 무뚝뚝할 정도였다. 친구들이 말을 걸면 대답은 하는데 자기가 먼저 말을 거는 법은 없었다. 때로는 친구들이 뭐라고 해도 대답도 않고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깜짝 놀라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표정도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웃음도 줄어들었다. 친구들은 서영과 같이 신나게 웃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친구들은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아빠를 잃은 충격에 병마까지 겹쳐, 몸도 마음도 다 상처를 입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고 상처가 아물면 예전의 서영이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저도 물론 그렇게 믿고 싶었어요. 친한 친구였는걸요. 만약 그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면 결국에는 저도 이상한 일 따위 모두 잊어버리고 다시 서영이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거예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죠. 그 일은 일어나고야 말았고, 그 이후 모든 게 달라졌지요…….”
하루는 다른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남거나 먼저 집에 가서 혜진과 서영이 단 둘이 하교를 했다. 혜진은 왠지 어색해서 말없이 걷기만 했는데, 서영이 불쑥 말했다. ‘내가 이상하지?’ ‘뭐?’ ‘알고 있어. 네가 날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거.’ 서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담담한 걸까, 아니면 무심한 걸까. 아무튼 중학생다운 얼굴은 아니었다. 혜진은 고개를 돌렸다. ‘내가 그랬나? 난 잘 모르겠는데?’ 서영이 잠깐 간격을 두고 말했다. ‘우리 아빠 말이야.’ ‘어?’ ‘왜 돌아가셨는지 알아?’ ‘과로사 아니었어? 심근경색인가 뭔가…….’ ‘맞아. 근데 말이야.’ 서영의 무표정하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빠의 동료 선생님들에게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거야. 남들 눈에는 안 보이는 남자가 보인다고.’ ‘그게 무슨…….’ ‘예전에 아빠 사진을 같이 봤던 거 기억하지?’ 혜진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서영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사진에서 본 남자야. 아빠가 동료들에게 얘기한 인상착의가 그 남자랑 똑같았어.’ 서영은 아빠를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혜진은 자기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드는 그 눈빛이 뼈와 살을 도려내고 그 안의 것들을 샅샅이 파헤칠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눈빛을, 혜진은 전에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런 얘기, 이상하지?’ 서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혜진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내가 이상하지?’ ‘서영아…….’ ‘나도 내가 이상해. 내가 이서영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인 것 같아.’ 서영이 또 한 걸음 다가오면서 주위 공기가 얼어붙었다. 때는 초가을로 아직 추울 시기가 아닌데도 팔뚝에 소름이 돋고 숨을 쉬자 입김이 하얗게 엉겼다. 도망치지도 못하고 간신히 뒷걸음질을 쳤다. 서영이 말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내가 그러고 있는 게 너무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져. 난 우리 집 침대 위가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야. 남의 집, 남의 자리에 잘못 찾아온 것 같은 느낌. 이해할 수 있겠니?’ ‘난…… 그런 거 몰라…….’ 더 이상 그 눈을 볼 수가 없었다. 혜진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침묵이 흐르다가, 잠시 후 발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뒤로 멀어지는 발소리. 눈을 떠보니 서영이 벌써 돌아서고 있었다. ‘미안해. 이상한 얘기해서. 그냥 누구한테라도 말하고 싶었어.’ 옆으로 비스듬히 돌아선 채 이쪽을 보는 그 눈은 아까와는 달랐다. 쓸쓸함을 애써 갈무리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준비하는, 그러니까 작별 인사를 할 때의 눈.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얘기할게. 내 이름, 사실은 서영이 아니야. 본명이 따로 있어. 한글로는 같은데 한자는 다른 이름.’ 지금 쓰는 이름은 살 서, 혹은 깃들 서(棲)에 꽃부리 영(英)자를 써서 서영인데 본명이 따로 있다는 거였다. 서 자는 같은데 영은 꽃부리 영이 아니라 신령 영(靈)이라고 했다. 영이 깃드는 서영. 그게 끝이었다. 이후 서영은 두 번 다시 혜진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교감이 이야기를 끊었다. “잠깐만. 선생님이 서영이 생활기록부도 보았는데 걔 이름이 그렇지가 않았어. 한자까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신령 영자가 아니었던 건 분명해. 그런 글자를 썼다면 이상해서 기억에 남았을 거야.” 혜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걔네 부모님이 이름을 바꿔주었다고 했거든요. 출생신고도 바꾼 이름으로 했대요. 영이 깃든다니 무슨 무당 이름 같아서 불길했다나.” “그럼 부모님이 지어준 게 아니란 말이야? 누가 지어준 건데?” “그것까지는 모르겠어요. 그 후로는 얘기를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제 28화에 계속) ::장르소설 전문 이타카:: http://www.ithaca.kr/ :: :: 본 작품 <산군실록> 의 저작권은 작가 김근우에게 있습니다. 본 작품의 영리적 이용을 금합니다.:: :: <산군실록> 삽화 저작권은 삽화가 솔에게 있습니다. 본 삽화의 영리적 이용을 금합니다.:: 






또 다음주까지 어떻게 기다리죠? ㅠㅠ 매주 이거 보는 낙으로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