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산에서 살아보면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꺽이고 만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덕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
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꺽이게 된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꺽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
리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법정, '영혼의 모음' 中



赤流
-Kissing The Shadows-




북방의 사막에 어둠이 덮혔다.
구 시대의 도읍은 그 사막 위에 있었다.
제대로 된 여관 하나 없는, 갈 곳 없는 노예들과 썩어 죽어가는
창부들이 힘없이 손짓하는 매음굴과 그들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역시 갈 곳 없는 용병들로 이루어진 저주의 도시.
어둠을 따라온 북풍의 여신이 도시로 보내온 차가운 미소를 피해
잠을 청하려는 객인들은 할 수 없이 매음굴로 발길을 옮겼다.
매음굴 제일 안의, 더 이상 갈 곳 없이 죽어가는 여인들이 모여
있는 폐처廢處. 문 앞에 늙은 여인들이 생기없는 눈으로 담배를
피우거나 포커를 하고 있었다. 촛불 하나 뿐인 낡은 책상을 놓고
뚫려있는 문 과 마주앉은, 애꾸에 난쟁이인 포주는 돈보따리를
끄르고 안에 들어있는 돈을 세고 있었다. 옆에서 늙은 창녀가 돈
에 손을 뻗자 손등을 탁 치며 하나뿐인 눈에 심지를 켰다. 그리
고는 다시금 돈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입을 헤벌쭉하게 벌리고
계속해서 세었다.
그 때, 포주가 등지고 있는 어두운 통로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
다. 포주는 의자에서 뛰어내려 작은 키로 아장아장 걸어 그의 앞
에 다가갔다.

-손님..벌써 나오셨습니까?
  등 뒤에 그건..

포주는 눈을 찡그렸다. 포주의 앞에 서있는, 미형이라 할 수 있
을 만한 갸름한 형태임에도 여기저기 거미줄처럼 그어진 상처 때
문에 혐오감을 주는 얼굴을 가진 젊은 사내는 무표정했다.

-어엇, 엇, 이러시면 안되십니다.
  물건은 놔두고 가셔야죠.
-돈은 아까 지불했잖나.
-네?
  하하..농담도..
  더 놀다가시는 건 상관없지만 이러시는 건 곤란합니다.
-이 여자는 내가 데려간다.
-..손님, 이런 이런, 더 이상의 농담은 곤란하다니까요.
  히익!
-꺄아아악!

늙은 창녀들이 비명지르며 흩어졌다. 푸른빛을 내며 뽑혀나온 검
은 난쟁이 포주의 머리를 세로로 양분했다. 비명지를 틈도 없었
던 포주의 몸은 피를 분수처럼 쏟으며 뒤뚱거리는 걸음을 뒤로
옮겨가다 쓰러졌다.
차마 뛰쳐나가지 못하고 옆에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는 늙은 창
녀의 옷 위로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낸 사내는 자신이 등에 낡은
시트를 찢어매어 엎고있는 여인을 곁눈질로 슬쩍 보고 포주의 쓰
러진 시체를 넘어 밖으로 나섰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용병 생활이 힘들게 되어 이곳에서 창녀들
과 공생하는 건달들이 그를 막아선 것은 서른 걸음쯤 걸었을 때
였다.

*

-우..가만가만..
  후..
  ..이년 죽이는데..
-적당히 해라.

소녀는 마치 인형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갈기갈기 찢긴 옷 사
이로 하얀 피부가 창백하게 드러나있었다. 번갈아가며 유린한 사
내들은 입가에 즐거운 표정을 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길드에 속해 있는 용병이었다. 이번 임무인 '모 귀족의
마차에 대한 습격'은 성공적이었다. 귀족과 그의 가족, 마부는
모두 시체로 변했다. 이 정체 불명의 소녀는 그들의 예정에 없는
존재였고, 여색에 굶주려있는 가난한 용병들은 임무 성공 후의
여흥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어이, 너 안할거냐?

산적의 소행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마차에서 값나가는 물건은 모
조리 긁어내라는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죽어있는 귀부인
의 손가락까지 잘라 반지를 털어내고 있는 젊은 사내에게 한 명
이 소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젊은 사내는 갸름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낮고 굵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관심없소.

그에게 권했던 용병이 다른 용병들을 보며 피식 웃고 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말했다.

-이런데 관심없다는게 말이 되나.
  이럴 때 하는게 돼지같은 갈보들한테 돈줘가며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구.

젊은 사내는 날카로운 눈으로 흘겨보듯 소녀를 힐끗 보았다. 다
시 시선을 돌리려던 그의 눈동자가 순간 굳었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나머지 용병들이 키
득거리며 그의 걸음을 눈으로 쫓다가 뒷정리를 하기 위해 마차로
걸어갔다.
소녀의 앞에 멈추어선 그의 머리를 바람이 살짝 스쳤다.
소녀를 잠시 내려다보고 있던 그는 옆에 무릎꿇고 앉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잡아서 일으킬 듯이 당겼다.

-으으..

소녀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녹색 눈동자가 애처롭게
굴렀다. 소녀의 머리채를 잡은 사내는 가만히 있더니 비수를 뽑
았다.

-아아악!

소녀의 입에서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엄청난 비명이 터져나
왔다. 슬슬 일하던 용병들이 모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핏방울
이 떨어지는 비수를 든 젊은 용병은 일어섰다. 그의 발 밑에서
소녀는 고통에 겨워 신음하며 뒹굴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손이
피로 붉게 젖어들어갔다.
다가온 용병들에게 젊은 사내는 칼로 소녀를 가리키며 낮은 목소
리로 물었다.

-죽일거요?

멍하니 소녀를 보고만 있던 용병 중 한 명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
었다.

-아무래도..그래야지..
  목격자는..다 죽이랬으니..
-팔아버리시오.
  미쳤으니 말은 못할게요.

젊은 사내가 소녀의 얼굴에 대고 침을 뱉었다.

-얼굴이 저 모양이라도 팔 수는 있을거요.
-취미 한 번 고약하군.

다른 한 명이 젊은 사내를 보며 비웃는 어투로 말했다. 그를 흘
낏 본 젊은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몫은 필요없소. 알아서들 나누시오.
-우리야 좋지.

묵묵히 서있던 한 명이 이렇게 말하고는 아직도 뒹굴고 있는 소
녀를 안아 일으켜서 얼굴에 대고 있는 손을 억지로 잡아떼고 상
처를 보았다.

-이건 좀 심하잖아.
  몇 푼 못받겠군.

젊은 사내는 묵묵히 뒷정리하기 시작했다.

*

건달들의 뒤에서, 아까 그 곳에 있던 창녀 하나가 울면서 사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알 수 없는 언어로 소리지르고 있었다.
얼굴이 흉칙한 사내는 앞에 서있는 용병들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
었다. 양옆에 있는 가게들의 할일없는 창녀와 남창들은 재미있는
구경 났다는 듯-하지만 불똥이 튀는 것은 싫은 듯-가게 안 깊숙
이 물러나 슬쩍슬쩍 내다보고 있었다.
사내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대한 체구의 남자가 사내 앞에
다가와 손에 낀 장갑에 박힌 징을 은근히 보여 위협하며 칼칼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씨,..등에 짊어진 것은 뭐요?
-내 아내다.
-아내?
-내 아내를 데려가는데 잘못된 것이 있나?
-이거 미친 놈 아냐?

거구의 남자가 한 마디 하자 옆에 둘러싼 건달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미치려면 곱게 미치지.
  난쟁이 새끼는 왜 죽여.

양손을 깍지끼고 거만하게 말하는 거구의 남자를 사내는 치켜뜬
눈으로 조용히 보고 있었다.

-일단, 그 년은 내려놔.
  그러면 갈비뼈 한 대는 남겨주지.

팔이 없는, 깍지로 연결된 손목 두개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구
의 남자는 자신의 손목이 사라진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가만히 서있다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비명을 지르는 그를 양 옆의 사내들이 부축하여 뒤로 빠지자 남
은 건달들이 빈틈을 메꾸었다.

-이런 씹할 새끼가!

뒷면에 톱같은 날이 달린, 특이한 구조를 가진 사내의 검에서 피
가 방울로 맺혀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보던 한 명이 이빨로 갈아
뱉는 듯 격하게 욕을 토하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칼과 도끼등
무기를 꺼내들었다.
약간 앞으로 숙인 채, 왼손은 뒤에 맨 여자를 받친 듯 붙잡은 듯
엉거주춤하게 대고 오른손목은 약간 비틀어 사정거리 안에 들어
오는 자를 베기 위한 자세를 취하고 사내는 가만히 서있었다.
자기네들끼리 눈짓을 한 자들이 일제히 다가왔다. 칼로 내려치는
도끼를 쳐올려 잠시 동작에 틈이 생긴 자의 얼굴에 일자를 그은
검은 옆에 서 다가오며 빠르게 단도로 찌르려던 자의 손목을 베
었다. 바닥에 떨어지려는 단도를 잽싸게 왼손으로 잡은 사내는
등 뒤의 여인을 노리며 검을 휘두르려던 자의 목에 꽂아넣었다.
그 사이 오른손의 검은 크게 회전하며 두 명의 목을 날려버렸다.
눈깜짝할 사이에 5명이 당하자 남은 건달들은 놀란 듯 잠시 뒤로
물러섰다.
흉칙한 얼굴의 사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낮게 자세를 취한
채 가만히 섰다.
피가 묻었지만 표정이 바뀌지 않은 얼굴..
뒤로 물러서있던 건달 중 하나가 눈을 크게 뜨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즈카'다..
-지즈카라니..미친개 지즈카를 말하는 거야?
-탈라르코 전투에서 철혈 기사단을 상대로 싸웠다는
  그 괴물?
-들은 적 있어.
  얼굴에 무수한 상처가 있다고..
  어린 놈이라고 했는데..
-제길.
-...누가 가서 '엔죠'랑 '기로' 좀 불러와.
-내가 갔다올께.

서로 중얼거리듯 대화하던 그들 중 하나가 뒤로 빠져서는 잽싸게
어디론가 뛰어갔다.
남은 자들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있었다.
구경하던 자들은 모두 어디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건달들의 뒤에
서 울고 있던 창녀도 어디론가 간 듯 했다.
비좁은 길은 그야말로 적막했다.

-비켜라.

사내는 조용히 말했다. 건달들은 조용히 있었다.

-비켜라.

사내는 다시 말했다. 건달 중 하나가 입술을 이죽이며 말했다.

-이 거리에 온 이상 빠져나가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사내는 검에 묻은 피를 한번 털고 고쳐잡은 뒤 앞으로 다가왔다.
직접 덤비려는 것을 안 건달들은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고 사내에
게 달려들었다.

*

그 때.
아버지라는 짐승의 시체를 불길에 태우던 그 때.
온갖 추악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태워버리던 그 때.
사내는 잊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라는 괴물에게 힘없이 깔려 유린당하던 나약한 여인이 가
지고 있던 얼굴.
이미 죽어 없어졌을 얼굴.
살덩이는 문드러지고 백골만 남았을 얼굴.
그 백골마저 풍상에 찌들어 닳아버렸을 얼굴.
갸름하고 유약해 보이는 그 얼굴을 물려받았지만 상처로 덧칠되
어 더 이상 그 얼굴을 떠올릴 수 없던 사내의 기억 속에서, 쓰러
져 있는 소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의 얼굴은 오래 전 여인
을 깨워내었다.
소녀를 잠시 내려보던 사내는 그 옆에 무릎끓고 앉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잡아 일으킬 듯 당겼다.
소녀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을 때 사내는 온몸이 굳을 듯 했다.
그 눈을 왜 이 소녀가 가지고 있단 말인가.
나를 놓아두고 사라진, 나를 지켜주지 않았던 그 자의 눈을 왜
이 어린 계집이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어머니..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것입니까.
당신의 망령이 왜 여기 남아있는 것입니까.
사내는 자신의 비수가 오래 전 망령을 지웠다고 생각했다.

사내는 소녀를 다시 찾아나섰다.
자신의 가슴에 서린, 망자의 기억을 찾아나섰다.
그를 져버렸고 그에게서 버림받은 여인의 낙인찍힌 혼백을 찾아
나섰다.
오랜 방랑의 끝에 만난 곳은 저주받은 도시의 매음굴이었다.

*

사내를 향해 찔러 들어가던 칼은 사내의 팔뚝에 얕게 박혀 멈추
었다. 사내의 검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컥..

갈비뼈 사이에 검이 박힌 자는 숨이 막힌 듯 눈을 뒤집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사내는 그 검을 힘껏 뽑아 당겨 뒤로 돌며 등 뒤에 선 자의 배를
가로로 그었다.
갑작스럽게 열린 배에서 쏟아져내리는 창자를 껴앉으며 앞으로
쓰러지는 자를 보며 옆에 있던 자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사내
는 놓치지 않았다. 사내의 칼끝이 목을 빠르게 찔렀다 뽑히자 그
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목을 잡고 뒤로 물러섰다.
사내의 발 밑으로 피가 몇방울 떨어졌다. 옷에 점점 스미는 피가
왠지 차가웠지만 사내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 뒤로 곁눈질하
며 등에 맨 여인의 상태만 살폈다.
남은 한명은 차마 못 덤비겠는지 덩치에 맞지 않게 손에 든 검을
덜덜 떨며 서있었다.

-어서 끝내지.

사내는 짤막하게 말했다. 그 말에 더욱 떨리는 손을 추스리지도
못한 채 건달은 보기 안타까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며 검을 위로 치켜들고 다가왔다.
사내는 칼을 칼집에 넣었다. 검을 위로 치켜든 폼 그대로 양다리
를 잘린 건달은 뒤로 넘어간 몸을 버둥거리며 이를 악물고 씩씩
거리며 동료의 시체를 넘어 어디론가 기어갔다. 잘린 다리에서
흐르는 피는 길게 두 줄을 그리며 계속 나아갔다.
더 이상 남은 자는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사내의 귀는 멀리서 다가오는 금속성을 주시했다.

쩔그렁쩔그렁..

사내의 눈에 먼 거리의 등불이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어둠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내는 등에 업고 있던 여인을 가게 옆의 벽에 살며시 내려놓았
다. 여인은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 가만히 앉아있었
다.
사내는 여인에게서 다시금 거리로 눈을 돌리고 칼을 빼들었다.
어두움과 금속성은 마치 하나인 듯 점점 가까이로 다가왔다.
사내는 몸을 약간 숙인 채 앞을 응시했다.
가게들에 걸린 등불을 가리며 올 정도로 비대한 몸집을 가진 남
자는 철퇴를 늘어뜨린 채 천천히 다가왔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금속성이 나지 않는다.
다른 방향이다.

쩔그렁쩔그렁..

순간, 칼을 들고 있는 사내의 팔에 쇠사슬이 감겨왔다.
낡은 지붕 위에서 작은 체구의 남자가 쇠사슬의 반대편 끝에 달
린 낫자루를 움켜쥐고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어이, 어이..미친 개가 날뛴다길래 와봤다.
  다들 벌써 물려죽은 모양이지만,
  일단 이리와서 나랑 놀아보자구. 자, 자..

지붕 위의 남자는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괴력으로 사내의 팔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사내는 양다리에 힘을 주며 버티어
섰다. 하지만 비대한 체구의 남자가 어느새 가까이 와 있었다.
지붕 위의 작은 체구의 남자가 또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런..엔죠가 먼저 자네랑 놀고 싶은가보군.
  엔죠, 내 몫은 남겨줘.
  나는 이렇게 가만히 잡고만 있을테니..

그의 말이 끝나자 사내의 앞에 서있는 거구의 남자는 천천히 철
퇴를 위로 치켜들었다. 가만히 서있던 쇠사슬에 끌려가던 위험한
상황이다.
거구의 남자는 장난감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사내를 내려보고 있
었다. 사내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비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찰나처럼 빠른 속도로 철퇴가 내려
치는 순간, 사내는 땅을 박차고 올라 남자의 비대한 몸을 밟고
뛰어 지붕 위의 남자에게 칼이 들린 손을 뻗었다. 흡하고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지붕 위의 남자가 낫을 휘둘렀지만 낫은 사내
의 이마에 얇은 한 줄을 그었을 뿐이다. 지붕 위에 있던 남자의
작은 머리통은 땅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거구의 남자는 순식간에 일어난 그 광경을 멍한 얼굴로 보고 있
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질렀다.

-우워어!

그 포효 속에서, 사내는 거구의 남자에게 몸을 날렸다.

*

많은 객인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각각의 매음굴로 사라졌을 때도
사내는 계속해서 걸었다. 수염도 제대로 깎지 못한 채 분을 바른
남창 하나가 다가오자 그는 뭐라고 말했고 남창은 그의 말을 듣
고 입을 삐죽거리면서 뭐라고 이야기하며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
리켰다. 남자는 인사도 없이 그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무엇인가를 수소문하는 듯 여기저기에 멈춰서서 물어보고 또 물
어보며 옮겨지던 사내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매음굴에서도 가장
안 쪽의, 웬만해서는 사람들이 가지 않는 곳이었다.
피부의 주름과 입가의 부종을 감추지 못한 늙은 창녀들이 기운없
는 눈으로 사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애꾸의 난쟁이 포주가 절름거리며 그들을 밀치고 튀어나와 양손
을 맞비비며 사내에게 물었다.

-헤헤..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원하는 분이군요.
  어떤 것을 바칠갑쇼?
  제 엉덩이라도 필요하시다면 대드리겠습니다.
-얼굴이 흉한 여자를 원한다.
  이 곳에 그런 여자가 새로 왔다던데..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말하는 사내를 보던 포주는 약간 찡그린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사내는 날카로운 눈으로 포주를 지그시 내려보더니 자신의 옷깃
에 손을 넣어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냈다. 포주의 하나뿐인 눈과
뒤에 앉아있는 늙은 창녀들의 눈이 모두 반짝였다.
포주는 거품이 흘러내리는 입을 벌린채 눈을 옆으로 굴리며 무엇
인가를 열심히 생각하더니 혀를 움직였다.

-하이고! 정말 제대로 찾아오셨습니다요. 나리!
  새로 들어온 년이 하나 있습지요. 대가리는
  돌았지만 얼굴이 추해서 손님 마음에 딱 드실 것입니다.
-어딨지?
-급하시기도 하시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것들아. 어서 비켜!

양 옆으로 비켜서 놀란 얼굴로 보는 늙은 창녀들 사이로 포주와
사내는 들어섰다. 포주는 옆에 걸린 등불을 하나 짚어들더니 감
옥같이 늘어붙은 좁은 방들 옆의 통로로 앞장서서 걸어갔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강한 향수가 느껴지는 통로 가장 구석의
방을 벌컥 열고 포주는 소리질렀다.

-야, 이년아. 손님 오셨다!

포주는 옆으로 물러서며 등불을 사내에게 건네었다.

-미치긴 했지만 어떤 짓을 해도 고분고분하니
  실컷 즐기시고 쉬시다 가십시요.

하나뿐인 눈을 찡긋하는 포주의 말을 들으며 사내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가 들어서자 포주는 문을 닫았다. 멀어져가는 포주의 발소리
를 들으며 사내는 등불의 희미한 빛으로 주위를 훑었다.
찌들대로 찌든 시트로 펼쳐진 낡은 침대 위에 여자 하나가 등을
벽에 기댄 채 누워있었다.
가슴 한쪽은 드러나 있었고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희미한 빛임에도 그 머리가 금발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
다. 남자는 침대 위에 무릎 꿇고 손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끝
으로 머리를 옆으로 살짝 쓸어넘기자 초점이 없는 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남자는 잠시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어머니..

*

-으..

아직 숨이 붙어있는 거구의 남자는 약하게 숨을 토했다.
사내는 그를 내려보았다.
그리고는 칼 뒷면의 톱날을 남자의 목 언저리에 대었다.
비대한 체구의 남자는 입술을 씰룩였다.
사내는 힘을 주어 남자의 목 언저리를 톱날로 썰기 시작했다.
주위는 고요했다. 무엇인가 기분나쁘게 마찰하는 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비대한 남자의 잘린 머리를 집어든 사내는 사람이 숨어버린 가게
중 한곳에 던져 넣었다. 아직도 지붕 위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피
를 한번 올려본 사내는 여인에게  걸음을 옮겼다.
사내의 얼굴에 새롭게 그어진 한 줄의 상처에서 떨어진 피가 가
만히 앉아있는 여인의 상처난 얼굴을 적셨다. 여인의 생기없는
녹색 눈동자는 사내의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여인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은 사내는 여인을 어깨에 짊어매고 그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그 곳은 한산했다.


<Fine.>




원작 : 황당무계 著, '광시곡狂詩曲 - 공통주제에 의한 변주 #02. 무덤 위의 소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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