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 때문이라 한다
그 해부터 난 많은 일을 잊고
복사꽃을 좋아한 것만 기억했다

-왕가위 감독, '동사서독'中



赤流
-Ashes To Ashes-




[1]

폐가는 시체들과 시체에서 흘러내린 피와 피에서 흩어지는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이 지옥같은 풍경속에 작은 등불은 힘없이
흔들리며 꺼질 듯 말 듯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자는 두 명뿐이었다.

-한잔하겠나?

의자에 힘없이 앉은 남자는 술병에 남은 술을 모두 잔에 따르고는
시체에 기대어 앉아있는 사내에게 물어보았다.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빠르게 잔을 비운 남자는 혼잣말처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르보사..
그곳 성주에게 보냈다.
빨리 쫓아가면 찾을 수 있겠지.
운이 좋다면...

의자에 앉은 남자는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운이 함께 하길 빌어주지.

의자에 앉은 남자의 배가 왈칵 벌어지며 무게를 못이긴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
다.
시체 옆에 앉아있던 사내는 말없이 일어났다. 손에 쥔 검은 바닥
에 묻은 피들이 당기는 것처럼 무거웠다. 검을 끌다시피 하며 폐
가廢家 밖으로 나온 사내의 얼굴을 신선한 밤 바람이 스쳤다.
그제서야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와 땀이 느낀 사내는 갑옷
여기저기에 찢어져 있는 부위를 빠르게 살펴보았다.
중상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사내는 달을 노려보았다. 달은 그의
시선을 피하듯이 구름에 가려졌다.
사내는 북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르보사 성에 자객이 침투한 것은 4일 후 였다.

[2]

에르토니아 평원을 지나는 자들이라면, 파손된 채 옆으로 누워
있는 쌍두마차 한 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마차와 마차에 매달린
한 필뿐인 말의 머리가 향한 방향을 따른다면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낡은 마차가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무심히 지나가는 사
람도 있겠지만, 조금만 주의깊게 본다면 마차 옆에 흩뿌려진 은화
들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가는 자들은 대부분 인근 지역 주민이거나
숙련된 여행자들 것이고 오랜 경험에 따라 마차에 접근하지 않고
모른 척 빠르게 지나칠 것이다.
혹시라도 우둔한 자가 은화에 관심을 느끼고 무모하게 접근한다
해도 마차의 지붕으로 나와있는, 머리 없는 상반신과 마차 뒤쪽
으로 나와있는 또 다른 상반신뿐인 유골을 보고는 불길한 느낌
에 방향을 돌려 자신이 가려던 길을 계속해서 갈 것이다.
좀 더 시간이 지나고, 유골이 풍화되어 뼈만 남게 된다면 약삭
빠르게 은화를 가져갈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마
차에 접근하는 것이 금기襟期되었다.

[3]

바르보사성 주변의 농노들에게 빠르게 퍼진 소문은 진실성 여부
를 떠나-적어도 그들에게는- 흥미로운 것이었다. 바르보사성에
자객이 침입했었다는 그 소문은 입에서 입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살이 붙었다. 그 이야기 중에는 허황된 것도 많았지만 가장 믿을
만한 부분만 모아 그중 납득할 수 있는 것만 추려내어 본다면
다음의 한줄로 요약되었다.
'자객은 성벽을 넘어 성주의 침실 근처까지 잠입했으나 발각되어
호위병들과 격투를 벌이다가 역부족으로 체포되어 지하감옥에 감
금되었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지만, 성의 병사와 간수들에게
몸품을 파는 엘리가 남편인 떠벌이 한스에게 한 이야기인지라 어
느 정도는 믿을만 했다. 정작 한스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자객이 용을 타고 성벽을 넘어 들어왔다느니 성 안에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이 다른 요정이 살기 시작했다느니 하는, 병사들이
지어냈을 것이 분명한 허황된 이야기조차 그대로 전해주는 아내의
순진함이 한스는 한심할 뿐이었다. 하지만 떠벌이 한스답게 그
모든 이야기를 충실하게 사람들에게 전달해주었고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다시 살을 붙여서는 다른 소문과 함께 나그네와 떠돌이
들에게 전해주었다. 바르보사 성의 그늘 속에 사는 그들에게는
자객의 출현만으로도 새로운 희망이 생기고 있었다.

[4]

델몬은 잘 달구어진 쇠꼬챙이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델몬은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일 자체에 만족하고 있었고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서커스의 차력사보다는 바르보사의 고문기술자로서의 삶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쇠꼬챙이를 조심스럽게 들며 앞에 매달려
있는 상처투성이의 사내에게 미소지었다. 사내는 무표정했다.
델몬은 순간적으로 미소를 지우고 화난 듯 일그러진 얼굴을 내밀
며 쇠꼬챙이를 사내의 살갗 위로 갖다대었다. 지직거리는 낮은
소리와 함께 무수한 상처 위에 또 하나의 상처가 만들어지고 있었
다.
서커스에서 쇠사슬을 끊으며 단련된 델몬의 굵은 팔뚝에 솟은
힘줄 하나 하나가 경련하고 있었다. 쇠꼬챙이를 이용할 때 힘 조
절을 잘못하면 깊으면서 멋지지 않은 상처가 만들어지므로 그는
섬세하게 다루고 있었다. 상처에서 나는 묘한 탄내가 그의 후각을
황홀하게 자극했다.
지금 묶여있는 자는 델몬이 만나본 죄수들 중에서도 최고였다.
지금껏 고문하는 동안 그는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숨같은 신음을 몇 번 들었을 뿐이다. 이 자가 눈물 흘리면서
비명지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빠르게 보려고 하면 안된다.
천천히,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공포의 표정을 그리며 비명지를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기에 델몬은 이 자를 소중히 다루고 있었다. 델몬이라는
예술가에게 이 자는 소중한 재료였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상처들
위에 델몬은 자신의 그림을 덧그리며 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자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이 자의 가죽은 벗겨져서 델몬의
방에 걸릴 것이다. 그것은 성주님이 허락한, 델몬에게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소중한 선물이기에 가장 완벽한 예술품을 만들어서 갖는 것이 그
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의였다.
델몬은 달구어진 쇠꼬챙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5]

베르게트는 눈을 떴다. 며칠이 지났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그 날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에 황급히 손을 대보았다. 이미
상처는 희미해져 있었다.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 자객이 순간적으로 검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는 목과 몸통
이 분리된 채 도포에 쌓여 다른 6구의 시체와 함께 성 밖에 버려
졌을 것이다. 다른 6명의 호위병이 고기조각처럼 베어져 나갈 때
그는 칼조차 뽑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검집에서 겨우 칼을 뽑아
냈을 때는 이미 자객의 칼날이 목에 닿아있었다. 칼날은 살갗을
살짝 파고든 채 고정된 듯 멈추어 있었다.
만약, 성주가 그 순간에 침실 문을 열어보지 않았다면...
성주가 침실 문을 열었다는 것은 자객의 검이 멈추고 짧은 시간이
흐른 뒤 겨우 수습된 정신으로 깨닫게 된 것이었지만 자객의 검이
멈추었을 때와 침실 문이 열렸을 때가 동시라는 것은 후에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알게 되었다.
성주를 죽이기 위해 들어온 자라면 왜 그 순간 검을 멈추고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순순히 잡힌 것인가...
그 때 자객의 눈빛은 아직도 기억한다.
마치 맹수처럼 이글거리던 불빛이 차가운 바람을 만난 듯이 일순
에 지워지던 그 눈빛은 마주 보고있던 베르게트의 눈에 각인되
어 있었다.
파도처럼 급격히 변하던 자객의 눈동자 속에 베르게트는 처음부터
없었다. 자객은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베르게트 뒤에 있는 성주의
침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 눈동자의 살기를 지우게 했을까.
베르게트의 호기심은 어느덧 새로운 기억을 깨우고 있었다.
그것은 베르게트의 눈동자에만 남은 잔상처럼 오랫동안 잊혀졌던
것이었다.
성주, 자객, 베르게트와 다른 호위병 외에 그곳에 있던 또 다른
한 명.
성주가 침실 문을 열었을 때, 성주의 손을 잡고 있던 작은 손.
작고 하얀 그 손은 분명히 베르게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똑같은 손을 본 적이 있었다.
머리와 눈동자의 색이 다른, 마치 인형같이 작은 꼬마.
며칠 전, 남서쪽에서 온 남루한 복장의 사람들이 성주에게 바친
다고 데려왔던 그 꼬마를 딱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이 은화를
잔뜩 받고 돌아간 이후, 그 아이의 모습을 다시 본 적은 없었지만
너무도 특이했기에 기억에 남아있었다.
자객의 목적이 성주의 목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베르게
트는 알 수 없는 희열이 느껴졌다.
그의 머릿속은 수마睡魔를 불러들이고 있었다.
자객은 다시 나타날 것이다.

베르게트의 꿈속에서,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자객은 한 마리의
맹수로 변하여 성벽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6]

엘게는 새끼를 여러겹으로 감싸듯이 하여 사내의 손목에 단단히
묶었다. 수갑을 덧채우고 쇠사슬을 연결한 뒤 도르래를 감아서
쇠사슬을 위로 바짝 땡기자 사내는 바닥에서 두세뼘 정도 공중에
뜬 모습이 되었다. 바닥에 쇠사슬로 고정된 족쇄 덕에 더 올라가
지는 않았다. 사내의 상처뿐인 몸을 보며 엘게는 찡그렸다.
엘게는 간수라는 자신의 직분에는 충실했지만 고문은 좋아하지
않았다. 델몬의 명령과 같은 부탁으로 고문실에 죄수를 묶어주는
것까지 그가 맡게 된 뒤로는 더욱 고문을 싫어하게 되었다.
상처의 몸에 그려진, 형언할 수 없는 무수한 상처를 불쾌한 표정
으로 바라보던 엘게는 혀를 두어 번 차더니 쓴 입맛을 다시며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굳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
었다.
사내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엘게는 혀를 찼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엘게는 자신조차 생각하지 않고 있던 행동을 하고 있었다.
손톱을 다듬거나 몸에 붙은 빈대를 터뜨릴 때 쓰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손가락 크기만한 칼을 반동강내고 있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본 엘게는 묵묵히 다물고 있는 사내의 입안에 칼날을 밀어넣
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삼켜. 고통이 짧아질 거야.

사내는 아무 표정없이 엘게를 보고 있었다. 엘게는 그가 못 알아
들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칼날을 문 채 굳게 다문 입을 보고
고문실을 나왔다.
이제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는 델몬에게 준비가 다 됐다고
전하고는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는 성문 근처의 헛간으로
가서 다른 병사들과 함께 노닥거리며 순서를 기다렸다가 엘리의
몸을 주무르면 되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끝날 것이다. 그가 사내의 입에 물려준 칼날
은 이미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일부러 지우고 있었다. 사내
가 죽고 난 후 시체 하나를 치우면 그만인 것이다.
작은 동정 하나쯤 베풀었다는 것은 기억할 필요도 없었다.

[7]

바르보사라는, 이 거대하고 외로운 공간의 주인이자 갇혀있는 자
인 롬멜슈타인 남작은 모든 것에 관대했지만 두 가지 중요한 규칙
을 세워두고 있었다.
첫번째는 자신의 잠자리를 방해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잠자리는 항상 신성하게 지켜졌으며 그를
피흘리게 하거나 그의 앞에서 피흘리는 자는 엄중한 처벌을 받게
마련이었다. 이 두가지를 어길 수 있는 자는 그와 같이 잠자리에
들 영광을 부여받은 어린아이들 뿐이었다.
어린아이의 순수를 사랑하기에 그는 이 두 가지 규칙을 그들이 지
키지 않는다해도 관대하게 용서하였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롬멜슈타인 남작은 자
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못하는 아이에게 분노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슬픔의 반복 속에서 남작은 결국 지고한 사랑을 얻
게 되었다.
아이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기쁨도, 즐거움도, 두려움도, 슬픔도, 사랑도 이 아이는 말하지
않았다.
남쪽에서 온 자들이 은화와 맞바꾸어 놓고 가던 그 순간 감정이
사라진 것인지 원래 감정이 없었던 것인지는 남작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머리와 다른 색의, 금은요혼이라 불리우는 이 특이한 아이의 눈
동자는 아무 감정도 담지 않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 그에게 어떠한 상처도 주지 않았다.
다만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이 아이와 만난 이후 매일을 행복 속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객에게서 자신을 훌륭하게 지켜냈다고 볼 수는
없는 호위대 장교 베르게트에 대해서도 관대한 처사를 내렸다.
베르게트는 어떤 처벌도 없이, 롬멜슈타인의 침실 앞을 지키는
임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허락받았다.

-수고하게.

베르게트에게 짧고 간단하게 인사를 전하고 롬멜슈타인은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의 사랑은 이미 침대에 앉아있었다.

문이 닫히는 남작의 침실 앞에서 베르게트는 정면에 뻗어있는
복도를 보며 묘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자객은 다시 나타날 것이다.
다시 이 곳에 올 것이다.
조용히 그 말을 되뇌이며 그는 자신의 검집에 손을 얹었다.

[8]

게으르지만 밤잠이 없어서 야간 담당을 주로 하는 간수 하쉬가
델몬의 시체를 발견한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델몬의 거
대한 체구가 화로를 덮친 채 익어가고 있는 것을 본 그는 델몬이
죽었다는 보고를 먼저 해야 할지 화로에서 뻗어나와 고문실 벽을
타고 천장에 올라간 불길에 대한 소식을 먼저 알려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뒤이어 나타난 놀넨이 그의 뺨을 때려 정신이
돌아오게 할 때까지 그는 당황한 채 서성였다. 그 사이 고문실을
가득 채운 불길은 빠져나갈 곳을 찾아 천장을 타고 흘러갔다.
놀넨은 불길 속에서 하쉬의 손목을 잡고 죄수들이 아우성치며
내미는 손을 피해 뜨겁게 타오르는 감옥을 빠져나와서는 다른
간수들과 병사들에게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렸다. 간수장 로이할
게는 특유의 큰 목소리로 빠르게 물을 옮겨 불을 끄라고 지시했
지만 불길은 빠른 속도로 지하 감옥을 지나 성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불을 끄기 위해 분란하게 움직이는 그들 중 누구도 델몬이 고문
중이던 사내의 행방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것은 방금
돌아온 엘게나 델몬의 시체를 본 유일한 사람인 하쉬에게도 중요
하지 않은 문제였다. 사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간수장의 고함에 가까운 외침 속에 불을 꺼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9]

베르게트는 눈을 크게 떴다. 시간의 아버지는 그에게 그 날로
다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이미 상처는 희미해져 있었다.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는 얕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예상대로 자객은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상처가 옷처럼 그려
진 몸뚱이를 갑옷처럼 내민 채 덤벼드는 사내의 모습은 더 이상
자객이 아니었다. 분노의 불꽃을 뿜는 야수처럼 달려드는 사내에
게 경악한 병사들은 하나씩 무너지고 있었다. 어린 병사 하나가
사내에게 자신의 검을 뺏기고는 허망히 서 있다가 목이 잘렸다.
그 목은 베르게트의 발 앞까지 굴러왔다.
4명..5명..6명..
이 복도에서 6구의 시체가 만들어졌을 때 베르게트는 자신의 앞
으로 다가오는 야수를 보았다. 다른 병사들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며 베르게트는 뒷걸음질쳤다.
그의 등뒤에는 성주의 침실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모든 시간은 그때와 같았다.
이 자의 목숨을 끊어야 한다. 그것이 베르게트의 임무이자 지금
살아있는 목적이었다.
베르게트는 빠르게 검집에서 칼을 뽑아내었다.
베르게트의 칼날을 기분좋은 소리를 내며 빠르게 뽑혔지만 이미
사내의 칼날이 그의 목에 닿아있었다. 사내가 자신의 손목을
움직일 수 없게 붙잡은 채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는 것을
느낄 때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베르게트의 목에 닿아있는
칼날은 병사들이 흘린 피의 온기로 미지근했다.
베르게트는 사내의 눈을 보았다.
그 날 보았던, 맹수처럼 이글거리는 불빛 앞에 베르게트는 숨조차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그 날 그 순간과 같았다.
그러나 침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베르게트는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사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베르게트는 자신의 목을 만져보았다.
이미 희미해져가는 상처를 느끼며 베르게트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점점 웃음소리는 커지더니 복도를 울리는 웃음으로 변해
갔다.

[10]

에를쾨니히...
어둠 속의 정령은 숲 속에 들어오는 아이들을 잡아 자신만이
아는 곳에 가두어버린다고 했다. 어린 시절 그의 유모가 들려준
이 이야기는 롬멜슈타인에게 악몽을 이용하여 에를쾨니히를 불러
내도록 이끌었다.
그가 악몽을 꾼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가 유모의 눈알을 뽑아
그의 손에 쥐어준 뒤 에를쾨니히는 꿈 속 먼 곳에 있는 어둠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결혼식을 올린 그 밤에 에를쾨니히는 돌아왔다.
마왕의 손에 비틀린 아내의 목을 보게된 롬멜슈타인은 두려움에
쌓여 눈물흘려야 했다. 그렇게 죽어가는 아내들을 보며 슬픔에
떨던 롬멜슈타인은 순수한 사랑을 찾아 헤매었다.
아이들의 곁에 있는 동안, 아이들이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동안
에를쾨니히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마왕은 돌아왔다.
핏내음을 풍기며 그의 잠자리에 들어온 야수는 숨조차 쉬지 못하
고 누워있는 남작의 옆에 있던 순수한 사랑을 나꿔채듯 껴안았다.
롬멜슈타인 남작은 자신만을 위한 천사가 하얗고 작은 손으로
야수의 목을 휘감은 것을 보았을 때 슬픔으로 가득 찬 머리를
감싸쥐었다.
분노의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미끄러져서 황급히 일어나는 그의
모습을 천사를 안고 있는 마왕은 움직이지 않은채 바라보고 있었
다.
롬멜슈타인은 눈동자를 굴려 빠르게 무기를 찾았다.
벽에 걸려있던 채찍을 집은 롬멜슈타인은 마왕을 노려보았다.
오늘밤 야수를 잡을 것이다. 길고 긴 악몽은 그렇게 끝날 것이다.
롬멜슈타인은 채찍을 휘둘렀다. 부드럽게 포물선을 그리며 악마의
등을 향해 꽂히는 채찍의 감촉이 손을 타고 어깨로 부드럽게 전달
되었다.
하지만 마왕의 그림자는 더욱 커졌다. 채찍을 맞은 야수는 날개를
펼친 용처럼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어둠은 롬멜슈타인을
향해 덮쳐들어 왔다.
바르보사의 성주인 남작 롬멜슈타인은 어둠 속에 사라지는 자신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빛을 쫓았다.
순수한 사랑의 눈동자.
아무런 감정도 없는, 천사만이 가질 수 있는 그 맑은 눈동자.
그 맑은 눈동자와 다시 마주쳤을 때, 롬멜슈타인은 예상치 못했던
놀라움과 섞인 두려움에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아이는 처음으로 미소지었다.

[11]

지하 감옥의 소화 작업에 정신없던 호위병들 중 청력이 좋은 일부
는 가늘게 찢어지는 비명을 들었다. 하지만 불은 아직 진정되지
않았고 간수장의 재촉을 받은 그들에게 비명은 신경쓸 거리가
아니었다.
불이 꺼진 뒤 쉬기 위해 돌아가던 간수장과 병사들은 성주의 문
앞을 지키고 있어야 할 호위병들이 황급히 뛰어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주의 침실로 향
하는 가장 빠른 통로로 가면서 죽어있는 여러 병사들을 보자
그들의 걸음에는 더욱 가속이 붙었다.
침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양 무릎을 끓고 앉아있는 장교 베르게
트를 볼 수 있었다. 간수장이 그에게 어서 상황을 말하라고 외쳤
으나 베르게트는 넋이 빠진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수장은
열려있는 성주의 침실 문을 보고 불길한 느낌에 꺼려하면서도 안
으로 몸을 옮겼다.
목에 칼날이 박힌채 자신의 침대 전부를 피로 물들이며 죽은
롬멜슈타인 남작을 보게 된 간수장은 무릎끓고 고개숙여 애도를
표했다.

[12]

소문은 바람과 같이 빠른 속도로 퍼진다. 그 많은 정보들이 모두
진실만 담고 있으면 좋겠지만 인간의 입에서 입으로 번져나가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거짓과 진실이 뒤섞이고 나중에는 진실이
사라져버리게 마련이다. 그렇게 퍼져나간 소문을 입담 좋은 음유
시인들은 다시금 다듬어서 다른 작가에게 전달한다. 그 이야기는
무지개 너머에 있다는 요정의 나라같이 신비하고 즐거운 전설이
될 수도 있고 아이들을 훔쳐간다는 숲 속의 마왕같은 무시무시한
괴담이 될 수도 있다.
바르보사에서 흘러나온 소문은 후자가 되었다. 바르보사성 지하
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이 솟았던 밤에, 그곳을 지나는 괴물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검은말을 타고 웅크린 검은 형체가
성을 빠져나가 바람처럼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검은 형체는 무엇
인가를 품에 안고 나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남쪽에 있는 먼 항구에 도착할 무렵이면, 불을 뿜는
어둠의 괴물이 위대한 바르보사 성주의 혼을 안고 어디론가 사라
졌다는 이야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눈먼 악사들은 이 이야기를
노래부르며 하룻밤 술값과 잠자리를 벌고 사람들은 그들의 노래를
귀에 새긴 채 여기저기로 돌아다닐 것이다.

[13]

석양이 그림자진 개울가의 허름한 오두막은 고요했다.
무엇인가를 찾는 듯 오두막 주위를 뛰어다니던 사내는 어느 순간
부터 멈추어 있었다.
사라졌다.
아이는 사라졌다.
바르보사 성에서 입은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아직 마르지도
않은 그의 곁에서 아이는 다시 사라졌다.
마치 이 곳에 아무도 없었다는 듯 조용한 오두막 안으로 들어선
사내는 어둠이 드리워져 가는 적막한 공간을 천천히 눈으로 살폈
다.
운명은 그의 노력을 비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올 일들을 속삭였다.
피를 흘리며 떠도는 자신의 모습을 환영渙影처럼 보며 사내의 얼
굴에 한줄기 물자욱이 그려졌다.
피와 맞바꾸어진 운명은 하나씩 그의 이야기를 펼쳐보일 것이다.

아샤라..내 딸..내 딸아..

사내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 잠겨 들어갔다.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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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赤流 -A Night At The Opera- 湛燐 2009-11-05 107
5 赤流 -Endress Supply Of Pain- 湛燐 2009-11-04 116
4 赤流 -Kissing The Shadows- 湛燐 2009-11-04 108
3 赤流 -Nocturnal Cries Of Agony- 湛燐 2009-11-04 122
2 [엽편]고향으로... liberalgeist 2009-11-03 139
1 [단편] 정의의 거짓말 1176 2009-10-26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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