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풀잎에 앉은
저 귀뚜라미
다리가 부러졌구나

-가케이




赤流

-Nocturnal Cries Of Agony-




사막이 지척인, 그러면서 동남쪽의 습기 가득한 바람이 불어와서
만들어낸 후덥지근한 기후에 모두가 지쳐있는 변방의 마을. 사막
을 건너려는 상인들과 사막을 건너온 자들. 어디로 갈 지 알 수
없는 나그네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하는 여인들과 그들을 쉬게
해주는 여관이 전부인 주토朱土의 거리.
사람의 발길이 닿기 좋은 위치임에도 간판이 없고 허름해서 왠만
한 사람은 찾지 않는 여관.


짤랑짤랑..

방울소리?
나는 눈을 떴다.

짤랑..

은은히 울리는 방울소리.
코끝에 맺혀있던 땀방울이 흘러 떨어질 때, 나의 손이 무의식적
으로 칼을 뽑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살의殺義.
정체불명의 살기가 나에게 다가왔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살기는 나의 두 다리를 타고 올라와 허리
로, 어깨로, 머리로 올라오며 나를 잠식시키고 있었다.

고개드는 순간 나는 베일 것이다.
나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죽는 순간에는 적의 얼굴을 보며 죽고 싶다.
난 공포로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내 앞의 적을 노려보았다.

작은 소녀..
예닐곱살이나 먹었을까 싶은 소녀.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한번 보더니 다시 무심한 얼굴로
방울달린 장난감을 흔들었다.

짤랑짤랑..

이 허름한 여관의 1층에 있는 것은 나와 소녀뿐이었다.
내가 느낀 그 살기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나 자신의 살기였던가..
나 자신에 대한 극한의 증오..
나는 다시 고개 숙이고 눈을 감았다.

짤랑짤랑..

방울소리..
생각나는 것이 있다..
잊고 있었던 것..
아니, 잊으려고 했던 것..

은은히 흔들리는 방울소리를 들으며 나는 잊었던 어둠 속으로 들
어가고 있었다.

*

어린 시절, 마땅한 장난감도 친구도 없는 나에게 어머니는 자신
의 옷에 달려있던 방울을 때어서 가지고 놀도록 주었었다. 하릴
없이 그 방울을 흔들며 낮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술에 취한 아버
지를 피해 숨어서 잠들었다.
그렇게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짤랑짤랑..

기운없이 흔드는 나의 방울소리는 적막한 집안에 희미하게 울렸
다. 이제 막 달빛이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한 집은 어슴프레하게
밝았다.

짤랑짤랑..

허름한 오두막집 문이 부서질듯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
을 때, 나는 방울 흔드는 것을 멈추고 문 쪽으로 눈을 향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리듯이 밖으로 나간
이틀 뒤, 아버지라 불리우는 짐승은 여느 때처럼 거나하게 취해
노래-이미 음조도 망가져 버린 음산한 소리-를 웅얼거리며 돌아
왔다.
비틀거리면서 탁자에 부딪힐 듯 걸어가더니 옆의 의자에 미끌어
질 듯 아슬아슬하게 엉덩이를 걸치고는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흔
들거리다 뒤로 젖히고는 개트름을 크게 한 번 토했다. 그리고는
다시금 음조가 망가진 소리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웅얼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마치 악을 지르는 듯이 바뀌었다.
내가 태어날 무렵 패망한 국가의 전사였던 짐승은 그렇게 추억속
의 군가를 울부짖었다.
나는 아버지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집 안을 찬찬히 살폈다.
여느 때와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어머니가 없다는 것을 빼면 말이
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조심스레 아버지에게 다가가 물었다.

-엄마는?

짐승은 노래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
았다. 그 눈속, 촛점은 흐릿했지만 어딘가 번뜩이는 광기의 빛은
나를 두렵게 했다.

-다시..말해봐..

혀꼬인 목소리로 짐승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그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
면서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물었다.

-엄마는? 엄마는 어디..

말은 중간에 끊긴 채 입 안에서 맴돌았다. 손에 쥐고 있던 방울
은 예의 맑은 소리를 내며 튀기듯 한 구석으로 굴러갔다.
그는 언제나처럼 의자에서 일어나 거대한 손으로 나의 뺨을 때리
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버릇없이..
그년..애새끼도 제대로 안가르치고..
개같은 년..

얼굴이 바닥에 부딪힐 때 이빨이 울렸지만 고개를 들면 안된다는
것을 체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다시 얼굴을 보이면 짐승은
또 때리고 찰 것이다.
입으로 중얼거리며 알아듣지도 못할 욕지거리를 뱉어내던 그는
다시 자리에 앉으려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으로 무너져내렸
다. 그의 거대한 체구에 부딪힌 의자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기울
어진 자세로 주저앉아있는 짐승은 상소리를 토하며 제대로 앉으
려고 발버둥치더니 어느 순간 기우뚱하며 옆으로 쓰러져서는 혼
잣말을 중얼거리다 그대로 잠들었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춰주어 깊이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몸을 일으켜세웠다. 모든 것이 침묵하고 있다.
나는 방 구석에 떨어져있는 방울을 다시 잡아 귓가에 대고 조용
히 흔들었다.

짤랑짤랑..

어머니는 다시 볼 수 없었다.

*

-이보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관의 주인이 돌아와 있었다.

-아까 알아봐 달라던 것 말이오.
대충 비슷한 여자가 있기는 했는데,
얼마 전에 팔았다던데..

그가 말을 끊고 위를 올려보며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나는 은화 한 닢을 내밀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여기서 정확히 북쪽, 대략 일주일 거리에 성도城都가
하나 있소.
그쪽으로 가는 상인에게 넘겼다니까 아마도 그곳에
있을거요.

그곳이 어딘지는 알고 있다.
인간이 만든 추악한 모든 것이 모여있는 땅.

그곳에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다른 것도 뭐 알아볼 것 없소?
그런 일 알아보는 건 까다롭기는 하지만 얼마든지..

여관 주인이 무엇인가를 메모하면서 의례적인 듯 던지는 이야기
를 끊고 나는 일어섰다

짤랑짤랑..

주인의 등 뒤쪽에 가만히 서있는 소녀가 방울을 다시 흔들었다.
나는 소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계단을 올랐다.

*

-이 새끼, 어디 간거야!

짐승은 한 마디를 내지르고는 다시금 술을 들이키는지 잠잠했다.

집 안에서 숨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하지만 무슨 방법을 써
서라도 일단 숨어야한다.
이 좁은 공간, 옷장은 문짝도 제대로 붙어있지 않았다. 안에 든
것은 옷이라 부를 수 없는, 찢어지고 벌레가 갈아먹은 천조각들
뿐, 그 옷장 구석에서 그것들을 방패막이로 나는 숨어있었다.

나는 강하다..나는 강하다..나는 강하다..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 믿고 있는, 어머니가 사라진 뒤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는 주문. 왼손에 어머니가 준 방울을 꼭 움켜쥔 채
나는 그렇게 되뇌이고 있었다.
갑자기 속에서 무엇인가 울컥 올라왔다. 구역질같은 울음이 밖으
로 쏟아지려했다. 나는 그것을 삼키려 손등을 힘껏 깨물었다.
불이 없는 것을 대신하듯 방안 가득히 비추는 달빛이 옷장 안으
로 들어온다. 나는 달빛에게조차 이곳에 있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구석으로 최대한 몸을 붙였다. 살짝 깨져있는 판자 조각이
등을 파고들었지만 그것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저 밖에 있는 짐승에 비하면..

-으아악! 모자르잖아!
씹할..이 새꺄! 술 가져와! 술!

야수의 울부짖음 같은 목소리와 두터운 술병으로 탁자를 내려치
는 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소리는 나의 공포심을 찾아 집
안 전체를 헤집고 다닌다. 그것의 차가운 손이 나에게 다가올 때
나는 양쪽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온몸이 으스러지게 구부렸
다.

-이 새끼가..어디 숨은 거야!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짐승이 일어났다. 나는 눈을 꼭 감았다.

나는 강하다..나는 강하다..나는 강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그 순간 나의 눈도 떠지며 주문도 잊었
다. 넝마에 난 구멍 사이로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커다란 술병을
들고 있는 짐승의 손이었다. 거대한 체구의 짐승은 비틀거리면서
도 온전히 방 가운데로 다가왔다.
하얀 달빛을 받아 차갑게 번뜩이는 눈을 굴리며 짐승은 나를 찾
고 있었다.

-이 쥐새끼같은 게 어디 숨은거야..

하얀 거품같은 침을 흘리며 나즈막한 목소리로 뱉는 한 마디.
그 한 마디에 나는 그대로 굳었다. 숨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제발, 이 순간 들키지 않게만 해달라고 생각했다.
손에 쥔 방울에 땀이 배어 미끈거렸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짐승의 시선이 내쪽을 보더니 멈추었다.
무의식적으로 나도 그 방향을 쫓아 눈을 굴렸다.
달빛에 내 발목이 드러나 있었다.

-이 새끼!

짐승은 옷장을 힘껏 밀어 쓰려뜨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튀어오르듯 뛰쳐나왔다. 문이 보인다. 저쪽으로
달려야한다.
짐승의 손은 나의 생각보다 빨랐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나의 머리를 능숙하게 움켜쥐어 들어올린
아버지는 바닥에 그대로 패대기쳤다.

짤랑..

손에 쥐고 있던 방울이 바닥에 한 번 튀기며 날아가는 소리를 들
으면서, 나는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소리질렀다.

-아아악!
-개새끼가!

나는 잡아 일으켜졌다. 그리고는 다시 패대기쳐졌다.
피가 섞인 침이 울컥 토해졌다. 아버지는 나의 목덜미를 잡고 바
닥에 짓눌렀다.
난폭한 힘에 목이 눌린 나는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눈 앞이 흐릿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놀려 말을 뱉으려 했다.

-아,..
-개새끼가! 개새끼가!

혀를 살짝 깨물렸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보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무거웠다.

-아..아버지..그..그만..
-뭐?

짓누르고 있던 손의 힘을 빼고 짐승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는 손을 떼고 일어나서 앉은 채 약간 뒤로 물러났다.
나는 일어설 기력도 없었다. 바닥에 얼굴을 댄 채 그의 움직임을
두려움으로 살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웃었다.
승냥이 울음같이 새된 소리로 숨죽여 웃고 있었다. 점점 웃음소
리가 커지더니 고개를 젖히면서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나에게 다가와서 내 머리채를 잡아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눈을 맞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 새끼..
가만히 보니까..그 암캐를 닮았구나..
씹할..그래..나랑 하나도 안 닮았어..
그 개같은 년이 흘레붙어서 낳은 잡종일 뿐이야..
잡종일 뿐이라구..버러지같은 잡종..

마주보이는 그의 눈은 붉게익은 얼굴과는 상극의 푸른 광기를 띄
고 있었다. 역겨운 술냄새를 뿜으며 그는 다시 말했다.

-그년을 닮았으니 똑같이 다뤄야지..
암캐같은 새끼..사내 새끼가 방울이나 가지고 놀고..
맞아, 넌 암캐야..넌 사내가 아니라고..

그가 손을 놓자 나는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힘없이 바닥에 떨구
었다.
잠시 후, 나의 등 뒤에 그의 무게가 느껴졌다. 귓가를 핥으며 그
가 내뿜는 숨의 술썩은 냄새가 나의 코를 찔렀다. 하지만 두려움
으로 가득찬 나의 몸은 그 역겨움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곧 이어지는 고통이 나의 몸을 파고 들어왔다. 반복적으로, 더욱
깊이 채워지는, 짐승의 무게가 실린 움직임으로 오는 구역질나게
더러운 아픔.
나는 고통을 참기 위해 흔들거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해도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신음이 교성으로 들리는지 짐승은 신이
나서 더욱 난폭하게 눌러들어왔다.

-흐윽,..헉..그년을 닮아서 그런지..죽이..는데..

언젠가는 죽여버리겠어..언젠가는..

고통의 반복 속에 갑자기 또렷해진 머릿 속에서 저주가 점점 형
태를 갖추며 떠오를 때, 짐승은 한 번 울부짖었다. 짐승은 침과
땀을 흘리며 내 등 뒤로 무너져내렸다. 갑작스럽게 온몸으로 깔
아누르는 짐승의 무게에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제기랄..넌 정말 그년을 닮았구나..
개같은..히히히..

짐승은 내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고는 웃으며 나를 짓누르던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는, 언제나와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림자는 방을 나갔다.
대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가 세차게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나
는 내 몸 아래 수치스러운 곳에 손을 대보았다.
더러운 점성과 섞인 탁한피..
짐승에게 물려받고 짐승과 뒤섞은 피..
나는 손에 묻은 피를 잠시 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체를 감싼 고통을 참으며 대충 앉는 자세로 몸을 지탱한 나는
차가운 달빛으로 가득찬 방안을 둘러보았다. 침대보조차 팔아치
워 나무 조각만 남은 침대와 넘어진 옷장과 그 안에서 쏟아져나
온 넝마같은 옷들..
그리고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어머니의 방울. 나는 다시 방울을
움켜쥐었다.

언젠가는 죽여버리겠어..

나를 지켜줄 주문이 사라진 대신 만들어진 저주하는 주문을 되뇌
이며 헛구역질이 나는 입을 최대한 굳게 닫고 눈물을 참으려 애
썼다.
눈물이 맺혀서 상이 흐릿해졌다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넝마 사이에서 저주의 주문이 내게 보낸 선물을 발견하였다.
돈이 될 만한 것은 군용 혁대까지도 주저없이 팔아치우는 아버지
가 왜 그것을 남겨두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무로 된 소박한 칼
집에서 반쯤 삐져나온 비수는 달빛을 담아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기어서 옆에 있는 넝마를 치우고 나무로 된 칼자루
를 잡아뽑았다.
물고기 창자같은 담금질 무늬가 달빛을 머금고 있었다. 활처럼
매혹적인 곡선으로 된 칼날은 오랜 세월 손질되지 않았음에도 예
리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칼등도 끝에서 3분의 2정도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그 칼이 얼마나 좋은 칼인지는 몰랐지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짐승을 사냥할 무기를 얻은 나는 일어섰다.

*

-벌써 방 빼시려구?

짐을 싸들고 내려온 나에게 여관 주인은 말을 던지며 로비에 들
어가서 섰다.

-그곳에 가시려나 보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두터운 장부를 펴놓고 잡다한 메모
를 보며 이것 저것을 모아서 옮겨적고 있었다.

-가시거든 몸조심 하시우.

적다말고 무엇인가 틀렸는지 숱도 얼마없는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다른 메모를 보고는 짜증난 표정으로 다시 옮겨적었다.

-뭐, 보기에 만만한 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곳은
영 사람 사는 곳이라고 할 만하지 않아서..

객잔 주인은 말하다가 나의 눈과 마주치더니 멈추고는 숙식비 계
산에 열중했다.
내 눈동자 속에 들어있는 것을 그가 보았는지도 모른다.

-잘 가시고 다음에 지나게 되면 또 들르슈.

모든 계산을 마치고 나는 밖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계단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 옆을 지나쳤다.

짤랑짤랑..

은은히 울리는 방울소리를 멀리하며 나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지
쳐있는 눈빛을 가진 인파들 속으로 발을 옮겼다.

*

-뭐,..뭐야..

거구의 사내는 당황스러운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본능적으로 손으로 가린 사내는 자신의 손을 뚫고 들어온 칼날을
술이 덜깬 눈으로 가만히 보고 있었다.
피가 흘러서 손목에 잡힌 주름에 고였다가 한 바퀴 돌아 바닥에
떨어질 때에야 그는 칼자루를 양손으로 꼬옥 붙잡은 채 떨면서
자신을 응시하는 소년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프잖아! 새꺄!

다른 손으로 술병을 들어 소년의 머리를 후려치자 소년은 옆으로
쓰러졌다. 넘어지는 그의 팔을 따라 사내의 손에 박혀있던 칼날
도 비틀리며 빠져나갔다.

-아악! 이 새끼! 이 새끼!

의자를 밀치며 일어난 그는 피가 흐르는 손을 보면서-다른 손의
술병은 내려놓지 못하겠는지 눈으로 상처만 보면서-흉폭한 발을
들어 쓰러져있는 소년의 몸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아프잖아! 이 새끼! 염병할 놈!
이 새끼! 이 새끼! 으악!

소년의 입에서 침이 게워져나왔다. 여기저기 걷어차는 발끝이 갈
비뼈를 찍었을 때 소년은 눈 앞이 흐려지며 억하고 숨이 막히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정신을 잃지않은 소년은 눈을 움직여 사내의 약점을 찾았
다. 자신을 공격하는 다리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던 소년은 힘껏
칼을 들어 그 다리의 종아리를 찔렀다. 다리를 찔린 남자가 비명
을 지르며 주춤거리는 새에 소년은 칼을 빼고 뒤로 기어서 물러
났다.
역시 놀라서 칼에 찔린 다리를 끌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난 사내는
다친 다리를 반쯤 접고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소
년의 손에 들린 칼을 한번 보고는 다시 소년의 얼굴로 시선을 돌
렸다.
찬찬히 양쪽을 번갈아가며 보던 그는 낄낄거리며 예의 승냥이같
은 웃음을 토했다. 그리고는 이를 갈며 튀어나오는 듯한 격한 목
소리로 말했다.

-나를..죽이려고..?

사내는 술병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술병은 바닥 한 구석에
떨어지면서 묵중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소년은 폭발하듯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내는 몸을 돌려 칼을 옆으로 피하며 소년의 목덜미를 나꿔챘지
만 소년이 뒤로 돌려잡고 찌른 칼에 옆구리에서 피가 솟았다. 사
내는 비명을 지르며 소년을 탁자에 밀쳤다. 탁자 모서리에 갈비
뼈가 세게 부딪히는 순간 소년은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얼굴
을 찡그렸다. 하지만 소년은 멈추지않고 칼을 든 손을 허공에 휘
둘렀다. 소년의 얼굴로 뻗어오던 사내의 왼손 검지와 중지 한 마
디가 피를 쏟으며 날아갔다.
짐승같은 울부짖음과 함께 다친 손을 그대로 뻗어 소년의 머리채
를 움켜쥔 사내는 있는 힘껏 탁자 위에 소년의 머리를 내리 찧었
다. 탁자 위의 빈 접시가 내려쳐진 이마에 부딪히고 흔들거리다
연거푸 내려쳐지는 이마에 깨져나갔다. 사내가 힘으로 눌러 그대
로 짓이겨지는 소년의 얼굴은 깨진 접시의 예리한 조각에 길게
찢어졌다.
소년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코가 뭉개지며 피를 쏟아내어 탁
자를 적셨다. 눈 앞이 가물가물했지만 손에 있는 칼은 최대한 놓
치지 않으려 애썼다.
숨을 씩씩거리며 탁자에 짓찧어대던 사내는 피범벅이 된 소년의
머리를 뒤로 젖혔다.

-방울이나 가지고 놀지 이딴걸로 어딜 덤벼..
누가 그 년 새끼 아니랄까봐..
미친 개새끼..

사내는 다친 왼손으로 소년의 턱을 후려쳤다. 이빨 몇개가 탁자
위로 쏟아져나왔다.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 사내는 소년의 머리
를 쥔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이 가진 증오심은 사내의 힘보다 강했다.
소년은 천천히 눈을 굴려 사내의 눈을 마주보았다. 마주보이는
달빛을 반사하는 사내의 눈동자를 보며 소년은 칼을 꽉 움켜잡았
다.

-컥!

사내는 소년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황급히 놓으며 자신의 목
에 가져다 대었다. 손가락 사이로 뜨뜻한 피가 울컥거리며 흘러
내렸다. 사내의 손에서 놓인 소년은 탁자쪽으로 쓰러질 듯 하다
가 탁자를 밀치면서 그 힘으로 간신히 몸을 버티고 섰다.
사내가 다시금 뻗은 왼손이 소년의 오른팔을 으스러질 듯 움켜쥐
었을 때, 소년의 칼이 사내의 가슴을 찔러들어갔다.
사내의 고개가 젖혀지며 입을 크게 벌리고 뭐라고 소리지르는 듯
했지만 걱걱거리는 거품만 올라왔다. 소년의 오른팔을 쥔 사내의
왼손에 엄청난 힘이 들어가며 비틀었다. 소년은 팔이 꺾이는 고
통에 비명을 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칼을 비틀어 더 깊이 찔러넣
었다.
억세게 소년의 오른팔을 잡은채 당기듯이 뒤로 두어걸음 물러나
던 사내는 고개를 앞으로 향했다. 부릅떠진 사내의 눈과 소년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달빛을 마주보는 사내의 눈동자 안.
그곳에서 소년은 자신의 눈동자를 보았다.
사내는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입가에 그렸다가 지우
더니 힘없이 뒤로 쓰러졌다. 팔이 잡힌 소년도 사내의 체중에 끌
려 그의 배 위로 쓰러졌다.
달이 이 밤의 마지막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소년은 사내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공포를 말하고 있는 사내의 마지막 표
정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소년은 일어섰다.
사내가 마지막 힘을 다해 잡고있던 오른팔은 소년의 뜻대로 움직
이지 않고 흐느적거렸다. 탁자에 부딪힌 갈비뼈가 움푹 들어간
것이 손에 만져졌다. 하지만 그런 것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문쪽으로 몸을 향하던 소년은 다시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는 사
내의 가슴에서 힘겹게 칼을 뽑아냈다. 굳어가는 피의 끈적함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듯 방 안으로 들어간
소년은 한 구석에 떨어져있는 작은 무엇인가를 물끄러미 바라보
더니, 다시 집밖을 향해 몸을 옮겼다.
인적없는 오두막집에 불길이 솟았다.
통나무 틈새로 타고 들어온 연기는 안개처럼 바닥을 덮었다. 피
비린내를 풍기며 굳어가던 핏자국들이 더욱 검게 물들었다. 허름
한 문짝의 틈새 사이로 불꽃이 틱틱 튀기더니 힘없이 메마른 문
을 굶은 야수같은 불길이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문을 태우고 들
어온 불길은 벽과 천장을 타고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가뭄으
로 메마르디 메마른 집은 불길에게 더없이 좋은 먹이가 되어 타
들어갔다.
대들보가 난폭한 불꽃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며 시체에 불을 옮
겨붙였다. 뜨거운 연기에 오그라들면서 시체는 흉칙하게 타들어
갔다. 시체와 얼마없는 가재도구와 함께, 소년의 증오도 붉게 변
해 검게 부서지며 지붕을 타고 올라 집 전체를 춤추듯 일렁이며
분노를 토하고 있었다.
구경하러 오는 이 하나없지만 신나게 타오르던 불길이 모두 사그
라질 때까지 소년의 눈은 불꽃을 쫓는 것 외에는 미동도 하지 않
았다.
잿더미만 남은 폐허를 보며 소년은 웃기 시작했다.
승냥이 울음처럼 새된 소리로 숨죽인 채, 소년은 웃었다.




<Fine.>


원작 : 황당무계 著, '광시곡狂詩曲 - 공통주제에 의한 변주 #01. 붉은 달의 야상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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