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하루 종일
부처 앞에 기도하며
모기를 죽이다

-一茶



赤流
-A Night At The Opera-




태양이 서녘으로 기울고 하늘에 고운 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강가의 작은 마을에는 집집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연기가 모락
모락 피어올랐다. 노을진 하늘에서 그 연기는 어스름으로 변하고
어스름은 땅거미가 되어 다시 내려앉는다.
강 낚시를 주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인 이 마을은 언제나
평온하다. 마을에서 성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나는 장터와는 대
조적으로 평온하다.
얼마 전, 어디의 문장인지 모를 엠블렘 표식을 한 일련의 패잔병
무리가 숨어들어온 이후 장터 쪽은 활기를 잃고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파산한 상인이 살던 폐가를 주거지로 삼은 패잔병 무리
는 처음에는 조용했으나 점점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패잔병들
과 시비가 붙어 다치는 사람이 늘어나고 겁탈당하는 사람도 생겼
다. 마땅한 치안 기구도 없는 이 곳의 사람들은 그저 참아낼 뿐
이었다.
사람들은 패잔병 무리가 사라져주길 바랬다.
그리고 그 바람은 전혀 예측못한 일로 인하여 이루어졌다.

*

여행자를 위해 생긴 음식점이었지만 지금은 술집인지 도박장인지
음식점인지 불분명해진 '에이레'의 한쪽 구석은 시끄러웠다. 술
에 취한 패잔병 무리에게 대낮의 햇빛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
들은 다 큰 어른이 듣기에도 민망한 농담과 욕설을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술잔을 비웠다.
다른 패잔병들이 '치프Chief'라 부르며 따르는, 약간 마르고 얼
굴에 한 줄 상처가 있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 앞의 테이
블에 와서 앉으며 차를 한잔 시켰다.
자신의 패거리들을 보고 피식 웃은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다가
그제서야 왼쪽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묵묵히 앉아 차를 마시는 사내와 그 옆에 앉아 음료수를 홀짝이
는 조그만 여자 아이, 그 둘의 묘한 조화가 치프의 호기심을 끌
었다.

-안녕하시오?

치프의 말에 사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안녕하시오.

둘의 대화는 멈추었다. 뒷쪽 테이블에서 욕지거리가 들리더니 동
료 중 하나가 의자에 앉은채 뒤로 넘어갔다. 그걸 보고 같은 패
거리들은 모두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치프는 따라웃으며 옆의 사내를 살폈다.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
지 않고 차를 마실 뿐이었다.
치프가 그런 그에게 다시 말을 걸려할 때 주인이 찻잔을 내밀었
다. 치프는 찻잔을 받아 자신의 앞에 내려놓고 사내쪽으로 고개
를 돌렸다.
그 때 사내가 약간 뒤로 의자를 빼앉으며 가려서 잘 보이지 않던
아이의 얼굴이 흘끗 보였다.
치프는 무심코 아이를 본 뒤 찻잔에 입을 대다말고 다시금 옆으
로 고개를 돌려 아이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찻잔에 다시
입을 대더니 한모금 들이키고 컵을 내려놓으며 약간 미소띈 얼굴
로 옆에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당신 딸이오?

사내는 그의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상처뿐인 얼굴
에 경계의 눈빛을 품고 있으니 흡사 맹수같이 보였다. 사내의 고
개가 움직이는 것을 따라 소녀의 얼굴도 움직였다. 검은 머리와
다른 은청색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렇소.

사내는 그에게 짧게 대답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굵은 목소리
였다.

-아, 별다른 뜻은 없소.
아이가 귀엽게 생겨서 물어본 거요.

치프는 말하며 눈에 웃음을 그렸다. 사내는 그런 그를 잠시 보더
니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 마셨니?
-응..
-일어나자.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를 안아 의자에서 바닥으로 내려주
었다. 그리고는 은화 한 닢을 탁자에 올려놓고 소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치프는 컵에 입을 댄 채 눈동자로 그를 쫓았다.
찻잔을 내려놓으면 치프는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장, 저 사람..누구요?
-네?

주인은 컵을 닦다가 흠칫 놀라서 되물었다. 그리고는 치프의 표
정과 문쪽을 보더니 입가에 웃음을 띄며 대답했다.

-아, 아랫마을 사람입니다.
이름은 모르겠고, 가끔 딸이랑 같이 와서
식사하는 정도예요.
-그렇소..

치프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쓰다듬으며 옆에 있는 빈 찻잔을 바라
보았다.

*

-안녕하시오.

강둑에 배를 고정해놓은 밧줄을 풀고 있는 사내는 갑자기 생긴
그림자에 고개를 올렸다. 강둑 위에 서있는 남자가 미소지었다.
얼굴에 한줄 상처가 있는 남자, 패잔병의 치프였다.

-안녕하시오.
-저번에 술집에서 한번 뵌 적 있지요?

치프는 무릎을 꾸브리며 사내의 얼굴에 높이를 맞추었다.

-요즘 낚시 잘됩니까?

사내는 대답하지 않고 물쪽을 한번 보더니 다시 치프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오?
-아아, 그냥 지나치는 길에 계시길래..

치프의 입에서 술냄새가 풍겼다. 사내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뭐, 좀 아는 사람끼리니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 올라오시죠?

치프는 예의 사람좋아보이는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사내는 그의
손을 한번 쳐다보고는 강뚝 위로 뛰어올랐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걷는 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할 이야기라는 게 뭡니까?
-에, 그니까 말이죠..

치프는 웃음을 띤 상태에서 눈빛을 번쩍이며 말했다.

-큰돈 좀 만져보고 싶지 않소?
-..

사내는 말없이 그의 눈을 보고 있었다. 너무도 무표정한 눈에 치
프는 약간 당혹감을 느꼈지만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댁의 딸 말이오.
머리 색이랑 눈이 아주 다르더군요.
-..
-이런 변두리 지방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걸 금은요혼이라고 하는 건데..그, 그러니까..

치프는 사내의 눈빛을 끊임없이 살피고 있었다.

-한마디로, 금은요혼을 비싼 값을 쳐주겠다는
양반들이 많으시다 이거요.

사내의 눈빛이 살짝 움직이는 것을 본 치프는 빠르게 말을 이었
다.

-혼자 사는 양반이라 들었소만.
보아하니 친딸도 아닌 것 같고,
키우기 힘드실텐데..
내가 받는 돈 중 5분의 1을 드리리다.
어떻소. 내 제안이?

사내는 치프와 눈을 마주친채 잠시 서있었다.
치프는 갈비뼈를 갑자기 둔기로 맞은 듯한 고통에 비명도 못지르
고 게처럼 옆으로 두걸음 비틀거리다 바닥에 손을 짚으며 쓰러졌
다. 사내는 손목을 한바퀴 돌리고는 쓰러진 남자의 옆에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또다시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거다.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치프가 겨우 일어나 앉았을 때 사내는 이미
떠난 뒤였다.

*

술을 마셨는지 비틀거리며 나온 남자는 쌓여있는 짚단에 오줌을
갈겼다. 바지를 추스르고 뒤로 돌아 다시 문으로 들어서려던 남
자는 등 뒤에 서있는 그림자를 느끼고 돌아섰다.
갑옷을 입은 남자는 달빛을 등진채 서있었다. 같은 무리가 아님
을 느낀 남자는 약간 꼬인 혀로 소리 질렀다.

-이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문 앞에 서있던 자는 그말만 남기고 건틀렛에 목을 맞아 뼈가 부
러지며 뒤로 날아가 황망히 문에 부딪혔다. 쓰러지는 그의 체
중으로 문이 살짝 열리면서 틈새로 패잔병 무리들이 얼필 보였다
. 완전히 무너져버린 시체 덕에 문이 벌컥 열릴 때까지는 찰나였
다.
안에 있던 무리들은 갑자기 열린 문을 보면서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몇몇 사람만 문 앞에 서있는 불청객에게 고개를
돌렸을 뿐 한쪽에서는 도박이 계속 진행됐고 다른 한쪽에서는 술
집에서 데려온 작부를 여럿이서 더듬느라 정신이 없었다.
치프는 구석의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다 말고 사내를 바라보더니
낄낄거리고 웃었다.

-여어, 형씨.
그렇게 꾸미니까 무슨 군인같군 그래.

그의 말을 따라 불청객을 보고있던 사람들은 큰 소리로 웃어댔다
. 사내는 그들을 응시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내 딸은 어디있나?
-뭐?

거칠게 막 자란 듯한 수염이 희끗희끗한 자가 취한 걸음으로 다
가오며 그에게 시비걸듯 물었다.

-당신 딸을 왜 여기 와서 찾아!
-너희들이 데려간 걸 알고 온거다.
-이 놈이 무슨 소리..

수염이 붉게 물들어갔다. 형체를 알 수 없이 이빨과 뒤섞여 뭉개
진 턱을 움켜쥔 채 남자를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 자식!

한 명이 외치면서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단검을 빼들고 달려들었
다. 그의 외침으로 모두의 시선은 사내에게 향했다. 사내는 무표
정하게 검집에서 뽑지 않은 칼로 남자의 어깨를 내리쳤다. 단검
을 놓친 남자는 뼈가 내려앉은 어깨를 움켜쥐고 무릎으로 주저앉
았다. 사내는 검집을 돌려 그의 목뼈를 쳐서 부러뜨렸다.

-아아악!
-저 새끼 뭐야!

일제히 일어서는 패잔병의 무리를 보면서 사내는 조용히 말했다.

-내 딸만 돌려주면 그만 돌아가겠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치프는 동료들을 둘러보고 다시 사내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무언의 대답으로 자신의 요구가 거절된 것
을 느낀 사내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으로 들어왔다.
칼이 칼집에서 미끄러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칼이 없는
자들은 주위를 둘러보다 술병을 내리쳐 날카롭게 깨고 있었다.
작부는 떠밀리듯이 일어나 사내의 옆을 떨면서 지나쳐서는  밖으
로 쏜살같이 도망갔다.
벽을 등진채 선 사내는 조용히 그들을 보았다.
사내와 가까운 곳에 앉아있던 세 사람이 천천히 다가왔다.
한명이 검을 내리치려는 것을 검집으로 손목을 올려쳐서 동작의
틈을 만들어놓고 검집 끝으로 인중을 찍어 밀쳐내면서 동시에 대
각선으로 베어내리는 검을 막아냈다. 그러면서 힘을 실어 휘둘러
베려던 자의 목을 쳐내어 뼈를 부러뜨렸다. 그 옆에 서있던 자는
칼을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옆사람이 쓰러지며 허우적거리는 칼
날에 이마를 살짝 베이자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첫번째 공격을 물리친 사내는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치프의 눈짓에 따라 일단의 인원이 일어서며 달려들었다.

*

어느 새 은하수가 제법 높이 올라갔다. 집앞 계단에 앉아 하늘을
올려보던 조그만 여자아이는 강둑으로 향하는 오솔길에서 장화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벌떡 일어섰다. 곧 이어 작
은 그림자 하나가 오솔길에 나타났다.

-아빠!

소리치며 달려오는 소녀를 중년의 사내는 양손을 뻗어 가볍게 안
아 올렸다. 소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코끝을 살짝 스쳤다.
소녀는 작은 팔로 사내의 목을 끌어안고 뺨에 입맞추었다. 사내
는 약간 지쳤지만 -엄청난 흉터로 덮힌 얼굴이기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부드럽게 보이지 않는-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딸을 껴안고 묵묵히 앞으로 걸었다. 소녀는 사내의 머리에 얼굴
을 파묻은 채 쌔근거리며 조용히 있었다. 머리 카락에서 강바람
내음이 낫지만 소녀에게는 익숙한 아빠의 냄새일 뿐이다.
부녀의 조용하지만 행복한 귀가를 숨어서 보고있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달뿐이었다.

*

사내의 칼날이 크게 원을 그리며 두 명의 머리를 횡으로 갈랐다.
왼팔이 잘린 남자가 괴성을 지르며 사내에게 칼을 뻗었다.
가죽으로 된 겉껍질을 찢으며 들어온 칼날을 안에서 부러지며 사
내에게 얕은 상처만 주었다. 사내의 칼은 그의 머리를 종으로 긋
자 혀가 쏟아지듯 내밀어졌다. 거구의 남자가 각목을 사내에게
휘둘렀지만 자신의 동료의 애꿎은 머리만 터트렸다. 사내의 칼이
남자의 배에 찌르고들어가 방향을 바꾸더니 옆으로 그어 빠져나
와 옆에 있는 자의 갈비뼈 사이에 박혔다.
이미 방 안에는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살아
있는 자들은 공포에 떨면서도 홀린 듯이 사내에게 덤벼들었다.
치프는 술을 한잔 마셨다.
악귀다. 치프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을 베고 있는 저 자는 악귀다.
춤추듯 사람들을 베고 있는 저 자는 악귀다.
흥겨운 춤을 추듯 사람들을 베고 있는 저 자는 악귀다.
나는 악귀를 건드린 것이다.
전장戰場에서 겨우 살아난 나에게 악귀가 쫓아온 것이다.
치프는 술잔을 집어던졌다. 옆에 있던 자들까지 악귀와 싸우기
위해 달려들어서 지금 치프의 주위는 텅 비어있었다.
약간 늙은 남자가 사내를 깨진 술병으로 찌르려다가 바닥에 있는
시체를 헛디디고 옆으로 쓰러지며 동료의 손목만 그었다. 살짝
긁힌 손목은 잠시후 사내의 칼에 날아갔다. 늙은 남자는 공포
에 질려 뒤로 물러나려다 핏물에 미끄러져 바닥에 넘어졌다. 그
의 배 위로 옆에서 무너져내리는 상반신이 들고 있던 칼끝이 떨
어지며 박혔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사람들은 즐거운 듯 슬픈
듯 미친 듯 비명지르며 끊임없이 칼을 휘둘렀다.
거구의 남자를 향해 턱 아래에서 정수리를 뚫고 들어갔던 사내의
칼날이 부러졌다. 부러지는 그의 칼날을 본 사람들은 일제히 괴
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칼날이 부러졌을 뿐 그의 핏빛
광기가 식은 건 아니었다. 사내는 왼쪽에 있는 자의 손목을 잡아
끌어 오른쪽에 있는 자의 목에 칼을 찔러넣게 만들었다. 그러면
서 반토막만 남은 칼을 왼쪽에 있는 자의 눈에 찔러넣었다. 그리
고는 오른쪽에 있던 자의 칼을 빼았아 앞에 있던 자의 창자를 헤
집었다. 대각선에 찔러오는 칼날이 사내의 귀를 반으로 쪼갰지만
사내의 주먹이 그의 코를 부수었다. 짧은 순간 사이에 네명을 황
천길로 보냈지만 아직 남은 적들은 그 사실에 개의치 않았다.
사내에게 딸의 목숨만이 목적이듯이 그들에게 목적은 단하나. 사
내의 죽음이었다.

*

사내는 야수같은 눈을 빠르게 굴리며 짐승처럼 빠른 동작으로 어
둠이 깔린 집안팎을 샅샅이 뒤졌다.
사라졌다.
사내의 목숨보다 소중한, 아니 그의 목숨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소중한 딸이 사라진 것이다.
사내의 눈동자는 절망과 분노와 공포가 미친듯 모여 붉게 빛나고
있었다.

아샤라..내 딸..내 딸아..

사내의 입 안에서는 딸을 찾는 아버지의 외침이 맴돌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바닥에 떨어진 엠블렘을 인식한 것은 얼마의 시간
이 흐른 뒤였다.
엠블렘..어디엔가 소속된 군병의 표식..
엠블렘을 손에 든 채 잠시 생각하던 사내는 어두운 방으로 들어
섰다.
옷장을 열고 안에 든 아샤라의 옷들을 거칠게 바닥에 내팽개친
사내는 옷장 뒤 합판을 뜯어내었다.
가죽 재질로 덮힌 갑옷과 2,3 가지 종류의 다른 칼, 건틀렛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 이민족의 도를 꺼낸 사내는 달빛이 있는 곳으로 들고 갔
다.

스르릉

은은한 소리와 함께 뽑혀나오는 칼날은 잔인한 날카로움을 내뿜
었다.
다시 칼집에 집어넣은 사내는 갑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었다.

*

술잔을 비운 치프는 일어섰다.

-후우,
  이제 우리 둘 뿐인가.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손에는 방금 쓰러뜨린 자가 들고 있
던 녹슨 검이 들려있었다. 건틀렛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피와 땀이 들어와서 뜰 수 없는 눈이지만 여전히 광기가 빛나고
있었다.

-당신같이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이
  이런 곳에 있다니, 아까운 걸.

치프는 약간 씁쓸한 어조로 말하며 다가왔다. 치프는 검집에서
칼을 뽑았다. 손잡이에 금도금이 되어있는 귀족적인 취향의 검이
었다.

-물어보지도 않겠지만, 이 검..
  꽤 고급스럽지?
  모시던 대공에게 하사받은 거다.

치프는 검을 쥔 채 손목을 살짝 돌리면서 풀어주었다.

-자네같은 장수를 예전부터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 딸은 어디있나?

사내는 말을 끊고 물었다.
치프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치프의 검은 일직선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어깨 부위의 장갑이
찢기며 피가 뿜어져나왔다. 사내의 검이 휘둘러졌지만 허공을 그
었을 뿐이다. 치프는 어느새 뒤로 물러서 있었다.
치프는 거리를 유지하고 검끝을 사내에게 향한 채 손목을 천천히
돌려 원을 그리며 말했다.

-이봐.
  자네 딸은 이미 여기 없어.
  벌써 낮에 여길 떠났다고.
  아버지라면 더 빨리 찾아왔어야지.

치프의 검이 다시 찔러들어왔다. 사내의 옆구리에 찢어진 틈새를
노린 검끝은 정확히 파고 들어왔지만 사내가 몸을 비틀어 깊은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치프는 다시금 뒤로 물러섰다.
사내는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는 신경쓰지 않는 듯 치프의 발을
보고 있었다.

-다음 공격이 언제 올지 보고 있는 건가?

치프는 말했다.

-전사로서는 최고군.
  하지만 아버지로서는 실격이야.

치프는 뒷꿈치를 살짝 들었다.

-우리같은 자에게 가족이라는 건 사치야.

치프의 검이 세번째로 파고들었다. 목을 노린 그 검을 옆으로 피
하자 주먹이 사내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일격을 맞은 사내는 뒤
에 있는 시체에 다리가 걸리면서 쓰러졌다. 치프는 검을 힘껏 위
로 올렸다가 내리쳤다. 사내는 들고 있던 검을 크게 한바퀴 휘둘
렀다. 두 개의 검은 엉켜서 옆에 있는 시체에 꽂히듯 박혔다.
무기가 없어진 치프는 사내에게 올라타고 다시금 주먹을 쥐어 사
내의 턱을 후려쳤다.

-나를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
  가족이 다 죽었을 때도 나는 살았어!
  프레데케 성의 시체더미 속에서도 나는 살아나왔어!
  멘보쟈 강에서도 나는 살아남았어!
  이렇게 나는 살아있다고!

연거푸 주먹을 날리며 치프는 악에 받힌 듯 소리질렀다.
사내는 이빨이 부러지며 정신이 흐려지고 있지만 왼손을 허우적
대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깨진 술병 조각이 손바닥 살을 찢으
며 파고들어왔다. 술병조각을 움켜쥔 사내는 팔을 휘둘러 치프의
귀에 찔러넣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치프는 주먹을 멈추고 귀를
움켜쥐었다.

-으아악!

고통에 상체를 일으킨 치프를 양손으로 밀쳐낸 사내는 옆으로 손
을 뻗어 치프의 검을 잡으려 했다. 그것을 본 치프는 비명을 지
르면서도 손을 뻗으며 달려들었다. 사내는 검을 뽑아내는 힘 그
대로 허리를 뒤틀며 다가오는 치프의 배를 그었다.
치프는 비명을 멈추었다.
잠시 사내의 눈을 응시하던 그는 사내의 어깨를 힘없이 두어번
툭툭 두들기고는 일어섰다.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에 힘껏 털썩 내려앉자 배에서 피가 흘러내
렸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 듯 치프는 술병에 남은 술을 쥐어짜
듯 잔에 따랐다.

-후, 이제 내 차례군..

치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사내를 보며 물었다.

-한 잔 하겠나?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치프는 잔에 담긴 술을 한번에 들이켰
다.

-바르보사..
  그곳 성주에게 보냈다.
  빨리 쫓아가면 찾을 수 있겠지.
  운이 좋다면..

치프는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운이 함께 하길 바란다.

치프의 배가 왈칵 벌어지며 무게를 못이긴 내장이 쏟아져나왔다.
치프는 고개를 뒤로 젖힌채 눈을 감았다.
사내는 말없이 일어났다.

*

폐가는 불태워졌다.
시체타는 역한 냄새가 온 마을을 덮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어젯밤에 갑옷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봤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아랫마을 어부 부녀가 안보인다는 이야기는 시체의 연기에 묻힌
듯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시체타는 냄새가 사라지고 난 뒤 장터는 다시금 평온해졌다.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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