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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의 「On Fairy Stories」 - 판타지 문학의 본질적인 즐거움은 도피와 위안에서 온다> - 현서

 

 

 

 

“오늘날 몽상의 이야기는 가장 명확하고도 과격한 도피주의 문학이다. 도피가 몽상의 이야기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라고 나는 주장해왔다. 따라서 나는 ‘도피’라는 말을 쓰일 때 은연중에 냉소, 연민의 억양이 뒤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감옥에 갇혔음을 안 사람이 밖으로 나가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비웃음을 받아야만 할까? 돌아갈 수 없을 때, 그 죄수가 다른 죄수나 또는 감옥의 벽 얘기 대신에 딴 얘기를 하면 안 되는 것일까? 죄수가 바깥세상을 볼 수 없다고 해서, 세상이 비현실적이고 동떨어진 피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평가들은 도피란 말을 잘못 쓴다. 죄수의 도피와 탈주자의 도주와 혼동하는 것이다.”

 

판타지를 ‘도피’라고 선언하는 이 글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판타지 소설의 거장 J.R.R 톨킨의 에세이 「On Fairy Stories」의 일부이다. 그는 처음부터 ‘도피’라는 용어를 판타지와 뗄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장르 판타지나 스페이스 오페라 같은 대중적인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톨킨이 말하는 ‘도피’라는 것은 흔히 말하는 장르소설이 가지는 대리만족과는 다르다. 그리고 평론가들이 판타지소설을 ‘현실과 유리된 황당무계한 이야기’라고 폄훼하는 것 역시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탈주자의 도주와 참된 도피를 혼동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판타지는 가장 과격한 도피주의 문학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판타지를 읽는다고 해서 사회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부조리한 삶 속의 노동자를 구해낼 수도 없다. 또한 우리는 프로도처럼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해낼 수 있는 어떠한 역할도 주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판타지는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세상으로부터 빠져나가려는 자들의 배출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판타지는 우리가 삶의 리얼리티에 찌들어서 볼 수 없었던 어떠한 경이로움을 주고 그 안에서 폐부를 찌르는 감동을 선사한다. 다시 톨킨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들은 범용의 리얼리티를 떠나 반인반수의 괴물, 용을 만나보아야 한다. 그러면 어쩌다 옛 목동처럼 양이나, 개, 말 그리고 늑대마저 새로이 보게 될지도 모른다. 몽상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러한 감정의 회복을 가져다준다. 회복(건강을 되찾는 것을 비롯해서)은 밝게 볼 수 있는 시야(視野)를 되찾는 것이다. 물체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게 아니다. 평범하고 눈에 익은 것의 단조로운 불투명성을 벗어날 수 있도록, 깨끗이 우리들의 유리창을 닦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와 친근한 사람들일수록 환상적인 속임수를 쓰기가 어려우며 신선한 관심을 갖고 대하기가 어렵다.”

 

톨킨은 환상으로의 도피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은 바로 ‘회복Recovery과 위안Consolation’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회복은 판타지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속성으로서 우리의 범용의 리얼리티, 그러니까 ‘현실성’에 찌들어 불투명한 우리의 눈을 깨끗하게 닦아주는 것이다.

 

우리의 눈을 깨끗하게 닦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디에 소용이 있다는 것일까?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판타지 문학을 읽을 때 우리를 잡아당기는 모든 이야기들은 대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사물들이 ‘일상의 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이다. 평범한 뒷산의 수풀에서는 요정들이 뛰어놀고, 깊은 샘물을 마시고 불치병이 낫는다. 늘 거실에서 보는 양탄자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주전자는 부엌에서 멋대로 춤을 춘다. 그 뿐인가? 집구석에서 찾아낸 반지를 끼면 모습이 사라지고, 지나가던 나그네는 놀라운 마법을 감추고 있던 현자가 되기도 한다.

 

판타지문학에 등장하는 이런 이야기에서 가장 친근하고 진부한 사물들은, 우리의 통념을 뒤집으면서 가장 경이롭고 놀라운 사건을 잠재하고 있는 사물로, 독자의 마음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즉, 판타지에서 숲 속의 요정들, 마법의 샘물을 읽어온 독자들은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경이로운 환상들을 실제 세계의 사물 속에서 감각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되찾게 된다. 판타지를 읽어온 사람들이 가지는 가장 큰 혜안은 모든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생텍쥐페리가 만났던 어린왕자가 모든 독자에게 믿을만한 존재로 생각될 수 있다면, 어린왕자가 되돌아간 B612호라는 별이 우리가 밤하늘에 바라보는 별 중 하나의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독자들 마음에 싹튼다. 『어린왕자』의 마지막 감동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밤하늘의 모든 별들은 독자들을 향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이 설렘과 두근거림, 거기서 가지는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시야. 바로 이것이 톨킨이 말하는 '회복'이다.

 

판타지가 도피주의 문학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치란 바로 이런 것이다. 판타지는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과 거대한 철학적 고민을 던져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눈을 좀 더 관습과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게끔 해주는 자유를 선사해준다. 도피는 세상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톨킨의 의미에서 '도피'란 그러니까 여행에서 얻게 되는 경이로움과 비슷한 것처럼 여겨진다. 여행이 일상으로부터의 탈주가 아닌,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선물하는 것처럼, 판타지는 문학적 상상력을 통하여 새 세계를 느낄 수 있도록 여행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 실로 판타지문학은 그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무료한 시간을 달래주기 위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야를 요구하고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한 시선을 새롭게 만드는 능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삶 속으로의 도피 속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판타지 문학이 우리 곁에 가장 친근하고 진부한 것들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회상에 가깝다. 판타지 문학이 '어린이 문학'과 연관을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공통분모는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판타지문학은 사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할 뿐이고, 그것은 사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던 단순한 진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단순한 것이 곧 평범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판타지가 가질 수 있는 문학적인, 그리고 궁극적인 지향이 담겨 있다. 톨킨의 「On Fairy Stories」의 마지막 부분을 잠깐 읽어보자.

 

"비극이 진정한 형태의 연극이듯이 해피엔딩이야말로 몽상의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몽상의 이야기의 위안은 해피엔딩의 즐거움이며 더 정확히 말해서 좋은 의미의 파국(破局), 예기치 않은 즐거운 전환(轉換)의 즐거움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도피자의, 또는 도피주의적 즐거움은 아니다. 몽상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종말의 즐거움은 예기치 않은 기적처럼 은총과 같다. 그것은 즐겁지 못한 파국의 존재, 슬픔과 실패의 존재를 부정하는 배타적인 즐거움은 아니다. 그것은 최후의 패배를 부정하며, 반짝 빛나다 사라지는 즐거움, 세속의 벽을 넘어 슬픔처럼 폐부를 찌르는 '즐거움'을 경험케 한다는 점에서 복음적이다. 몽상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건이 아무리 황당무계하고, 모험이 제아무리 환상적이고 끔찍하다고 하더라도 귀를 기울이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이야기의 전환이 올 때, 한 순간 그들의 숨이 막히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어떤 형태의 문학이든 진지한 문학만이 줄 수 있는, 폐부를 찌르는 슬픈 눈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훌륭하고도 완벽한 몽상의 이야기의 커다란 특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톨킨이 말하는, 판타지의 도피가 가져오는 '위안'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로 읽혀야 한다. 우리는 판타지에서 기막힌 반전이라든가 놀라운 사유, 치밀한 전개와 개성 있는 캐릭터 등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선이 악과 대결하여 승리한다.'라는 전형적인 판타지문학의 내러티브는 그러므로 사실 판타지를 읽을 때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최후의 패배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에서 일어나는 기적과 같은 사건들의 연속 - 톨킨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이 서사의 중핵을 이루는 '내재적 리얼리티'이다 - 이 얼마나 납득할 수 있도록 이야기 속에서 펼쳐지느냐이다. 호즈슨 버넷의 『비밀의 화원』을 현실적인 눈으로 날카롭게 직시하자면, 이 작품의 이야기구조는 마치 우연의 연속처럼 보인다.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찾아주는 울새라든가, 화원의 꽃을 가꾸면서 아이들의 심성이 차분해지고 다리를 못 쓰는 아이가 일어날 수 있는 사실은 허황된 이야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작부터 끝까지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회복의 시야'가 진하게 녹아있다. 이 작품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에는 '자연의 축복'이 있다. 비밀의 화원은 현실세계와는 같아 보이지만, 사실 '자연의 축복과 은총으로 충만한 판타지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은총으로 총화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당위적 사건들의 자연스러운 연속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은총에 이끌려 도달하게 되는 대단원의 해피엔딩 - 걸어 다니는 아들과 아버지의 해후 - 에서 전하는 감동은 톨킨의 지적처럼 '복음적'이다. 판타지문학의 본질이 '반성'과 '성찰'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점에서 판타지는 다른 문학작품과 구별되는 가장 독자적인 미학적 가치를 획득한다.

 

판타지문학은 근본적으로 도피를 수반한다. 그것은 분명 즐겁고 설레는 도피이다. 그리고 그 도피는 독자들의 관습에 묶여왔던 진부한 세상을 좀 더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판타지가 가지고 있는 본연적인 속성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판타지문학'은, 그저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심심파적거리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인물들과 함께 유영하면서 우리의 일상에 젖어 망각하고 있었던 사물의 새로운 모습을 다시 되새기고 그 되새김질이 책을 덮은 다음에도 지속되어 바로 옆의 사물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학 중에서도 가장 복음적인 마력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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