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SF를 좋아하는가> - 김창규
이 문제를 작정하고 돌아보게 된 것은 SF를 즐겨 읽기 시작했던 것보다 훨씬, 그러니까 20년 쯤 지난 뒤였다. 하는 일과 입장이 생기다보니 모든 질문을 피할 수는 없게 되었고, 한 번 쯤 정리를 할 필요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대답은 변함없이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재미있으니까. 하지만 '재미'란 말은 번거롭고 소모적인 질문의 악순환을 끌어내는 도화선이 된다. '허구의 유희성'을 만병통치약처럼 내밀면 되기야 하지만 그래서는 SF 얘기하라는데 무슨 딴소리냐는 반응을 보기 일쑤다. 그러니 게으름을 잠시만 밀어놓고, 글로 풀어냄으로써 사실과 다소 멀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은 정리해본들 뇌세포에 크게 무리가 가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SF를 좋아하는 이유란 SF란 무엇이냐는 질문의 대답과 이란성 쌍둥이쯤은 된다. 나는 여타 장르물과 SF, 특히 판타지와 SF를 굳이 서로 배타적인 위치로 놓으려는 시도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SF를 억지로 간략하게 정의해 본다면 '지금, 여기서는 아니지만 언젠가, 어디선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핵심이 되는 것은 '일어날 수도 있는' 이다. 그렇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 과연 그 여부를 객관적으로 가를 수 있을까?
공백을 뺀다면 일곱 글자 밖에 안 되는 수식어구이지만 '일어날 수도 있는' 이란 사실 무시무시한 말이다. 자동차를 몰던 도중 눈을 깜빡여보니 700km 떨어진 장소에서 달리고 있더라.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을까? 젖니를 뽑아서 지붕에 던지면 새가 물어가고 간니를 가져다주는 일은? 어느 날 은하가 자전을 멈추고 그 영향으로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지상의 모든 동식물이 타죽는 일은 어떨까? '너는 어떤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란 곧 세계관과 우주관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세계관을 가지기 위해서는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것으로 부터 출발해 그 사이의 관계와 거시적인 역학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공, 이 우주가 어떤 원리에 기반해 돌아가며 그 구조는 어떤지를 인지해야 한다. 신이 이레 만에 천지만물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 이와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은하단의 지름보다도 멀리 떨어진 세계관의 차이가 있다 (참고로 우리 은하가
속한 은하단의 지름은 대략 600만 광년이다).
따라서 앞서 얘기한 SF의 간단 정의에는 다른 조건이 숨어있다. 이제는 더 이상 간단하다고 할 수도 없는 정의이지만 다시 한 번 적어보자. SF는 '이 세상에 불가지(不可知)는 없고 단지 미지(未知)가 있을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언젠가 어디선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만든 이야기' 라고 할 수 있다. 미지란 아직 모른다는 얘기이니, 다시 말해 SF란 삼라만상을 언젠가 이성의 힘으로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또는 적어도 그런 세계관을 가진 것으로 설정한, 작가라는 이름의 아바타들이) 만들었다는 말도 된다. SF에 과학이란 말이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관점 때문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과학이란 이공계 학과 출신들만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다. 반드시 사실과 합치한다는 의미의 과학도 아니다. 이성과 논리로 세계라는 미궁을 헤쳐나가고 그 구조를 파악하려는 태도의 총합이 바로 과학이다. 기술이란 그와 같은 모험을 통해 얻은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SF란 숨막히고 협소할까? 이성이라하면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느낌이 든다. 과학이라면 골치가 아프다. SF란 과학 매니아들만이 즐길 수 있는 장르일까?
아마 답은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이성적인 세계관의 근본은 회의적인 태도에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신통력을 불어넣은 물이 고장난 세탁기를 고친다고 말할 때, 누군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숟가락을 구부리고 전원을 넣지 않은 라디오를 작동시킬 수 있다고 말할 때 과연 그 기제가 무엇인지 따져보고 의심하는 것이야 말로 이성의 출발이다. 회의와 의심의 대상에는 귀천이 없다. 과연 정신과 육체는 따로 뗄 수 있는지, 영혼이 수천 년에 걸친 사기의 결과물은 아닌지, 최면술에서 이야기하는 일명 '트랜스 상태'라는 것은 정말로 뇌가 취하는 여러 모습 중 하나인지...... 지금 이 글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시각'이 사실은 세계의 아주 협소한 부분만을 인지하는 기능은 아닌지. 이성에 도달하기 위한 길은 끝없는 '만약'으로 이루어진다. 바로 여기에 SF가 가지는 무한한 여유와 장점이 있다. 역설로 보일지 모르나 SF이기 때문에 비상식적인 이야기들을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탈바꿈 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독특한 착상과 수많은 만약을 늘어놓는다고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갑자기 지구와 우주의 시간 흐름이 달라지건 지구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물을 통해 도청이 가능하건, 그런 일들은 어떤 시간과 어떤 장소, 즉 어떤 세계에서 벌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원리가 있어야 한다. 흰 깃털을 온 몸에 붙이고 하늘에서 내려온 생물이 인간의 미래를 알려줄 수 있다면 그 '생물'은 특정 진화과정을 거쳐야 하며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시공을 인지해야 한다. 머나먼 세계의 (또는 아예 다른 평행 우주의) 이야기를 그린다 해도 현재 글을 읽는 독자가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그 세계의 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SF 작가는 익숙함과 낯섦 양자에 걸치는 다리를 세우기 위해 재능을 발휘한다.
이처럼 불가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태도 (또는 그 불가지 마저도 소재로 요리하는 태도)와 새로운 세계 안에 들어있는 작가의 포석들이야 말로 SF의 기본 요소이다. 그리고 이 둘을 잘 섞으면 새로운 효과가 탄생한다. 이른바 경이감(Sense of Wonder)이라는 것이다. 비록 외계인은 탑승하지 않았지만 지구와 다른 문화와 기술에 바탕을 둔 거대 우주선이 다가온다. 선발된 지구인들은 거기에 들어가 낯선 기계와 시설물을 보고 기능과 제작자의 의도와 문명의 양상을 추측한다. 그리고 우주선은 무심하게도 돌아가 버린다. 이렇게 끝나는 SF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줄까. 이 드넓은 우주에는 우리만 사는 게 아니라는 감상, 그들은 아마도 우리와 다른 관점으로 세계를 볼 거라는 짐작. 우리는 타인을 만남으로써, 비록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그 사람의 일부 면면만을 보고도 자아를 확장할 수 있다.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관계, 이질적인 세계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고난, 수십 세기 동안 한정된 기능만을 해왔던 육체를 벗어남으로써 느끼고 알고 체득할 새로운 경험들, 인종차별과 계급이분화를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상황들. SF를 읽고 감상함으로써 맛 볼 수 있는 이 신종 느낌들이야말로 현재와 과거와 여기에 목을 매고 살던 우리에게 색다른 아로마 테라피가 된다. 물론 그 결과는 의식의 다양성 확보와 자아 확장과 고양의 느낌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SF에 들어있는 일반적 매력이다. 나 역시 그 셋을 누리는 기쁨 때문에 SF를 즐긴다.
하지만 아직 남은 것이 있다. SF는 나에게 묘한 의무감 또는 숙제를 남겨 준 모양이다. 이성과 과학은 세상을 해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활용하려 한다. 그래서 기술을 낳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성과 과학과 기술의 주체는 바로 우리 인간이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그 셋은 삼총사가 되어 우리에게 역으로 영향을 주고 세계를 구성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간다. 이처럼 신종 밈(meme)과 인간이 (또는 지적 존재가) 상호교류하는 모습이야말로 고유한 상상력을 이용해서 SF가 그려나가는 대상이다. 어쩌면 이제 의식이란 방 한구석에 쳐박혀서 벽지나 할퀴면서 우울증 및 내적인 고민과 씨름하는 데에나 쓰는 도구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우주에 숨어있는 뭔지 모를 물질들을 통틀어 암흑물질이라고 한다. 풀고 즐겨야 할 암흑물질, 즉 미지는 사방에 있다. 과학은 물리적 우주와 우리의 '정신'을 연일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해준다. 바뀐 관점은 생각을 전환시키고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을 바꾼다. SF는 상상력이라는 연료를 부어 그 가능성을 더욱 확장시킨다. 어쩌면 더 나아가 미지란 우리가 어리석게도 용인해왔던 부조리들을 일소하고 스스로를 개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백보 양보해서 온갖 자족적인 설명들을 다 저쪽으로 밀어놓더라도 골똘히 생각할 놀이기구들을 SF만큼 갖춘 놀이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야기란 소비자나 생산자 모두에게 매력적인 지적 유희이고, 놀이는 아이를 성장시킨다. 어떤 장난감이 어떤 어른을 만들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다양함이 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이쯤에서 눈을 들어 저 앞쪽을 보자. 미래 쪽으로, 의식의 지평선 보다 더 먼 곳을 향해. 만약 지적 진화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어느 쪽에 있을까. 진화는 무작위적인 시행착오 끝에 얻을 수 있고 그 가짓수는 많을수록 좋다. 당연히 몇 십 년 정도로 성취할 수 있는 성과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가장 다종다양한 기구들을 구비한 놀이동산 너머에 있을 것이다. 너무 성급하고 막연한 기대감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에게 SF란 그 놀이동산과 같다. 그 안에서 놀고 또 놀이기구를 짓는 데에 일조하고 싶다. 그러면 지금과는 다른 나, 다른 의식의 일부라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이성과 상상력이 문화의 웜홀을 찾을 수 있다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